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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하는 사람들

by 그방에 사는 여자
피테르 부뤼헬. 네덜란드. 추수하는 사람들.

16세기에 그려졌다는 '추수하는 사람들'을 보았을 때 인상 깊었던 점은 익숙함이었다. 먼 옛날, 먼 나라에서 그려진 풍경이 내 기억 속의 모습과 너무나 흡사해서 더욱 그러했다. 이토록이나 평범한 삶이 이렇게나 위대 하다니, 내 삶 속에는 얼마나 위대한 순간들이 많았던 것일까? 위대한 예술작품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정서를 품고 있음이 느껴진다.

나에게 기억이란 시간이 아니고 공간이다.

저 멀리 교회의 종탑, 참새 때, 누런 들판. 지게를 지고 돌아오는 아버지, 바깥 마당에서 머릿수건을 쓰고 도리께질을 하는 엄마, 어스름 저녁, 연기가 피어오르던 회색 굴뚝, 이런 풍경들이 하나의 커다란 공간으로 차곡차곡 쌓인다.


이손 저손 걸러큼씩 바꿔가며,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밥 광주리를 이고 앞서가는 엄마의 월남치마를 따라가다 보면, 주전자 주둥이로 막걸리가 넘쳤다. 논둑길을 한참을 걸어 논 배미에 도착해, 밥 광주리를 내려놓던 엄마는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 같다고 했다. 무거운 것이 짓 누르고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나도 빠질 것 같이 얼얼한 팔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논둑에 둘러앉아 밥을 먹다가, 누군가 지나가는 이가 있으면 밥 먹고 가라며 불렀다. 밥은 항상 많아야 하고 여벌의 숟가락이 있어야 했다.

논둑에 앉아서 가뭇없이 바라보던 들판은 끝이 없이 펼쳐 저 있었다. 한줄기 바람결에 웃던 그때가 위대한 순간이었을까. 빈 주전자를 흔들며 가벼워진 광주리를 한 손으로 잡고 한가롭게 돌아오던 엄마와 들길에서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기억에 없다. 아름다운 순간들은 퇴적암처럼 쌓여 찰박이는 물소리를 낸다.



'나는 매트로 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작가' 패드릭 브링리'는 ' 가끔 나는 어느 쪽이 더 눈부시고 아름다운지 잘 모르겠다. 위대한 그림을 닮은 삶일까? 아니면 삶을 닮은 위대한 그림일까?'라고 말했다. 상처를 부려놓고 바라보기 위해. 미술관이라는 가장 아름다운 세계에 숨어들었던 작가는 말없이 그림들을 응시했다. 위대한 예술작품에 둘러 싸여, 존재하되 투명해지는 사람으로 살아가던, 작가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과의 연대감과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으로 일상을 일궜다.


인간은 자신과 닮아 있으면서도 다르기도 한 대상에 매혹된다. 피테르 브뤼헬의 그림 속에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농촌의 모습이 펼쳐 저 있지만, 가난이라는 녹록지 않은 현실은 배제되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걸까? 우리가 예술에서 꿈꾸는 것들은 그런 것일까? 예쁘게 포장하는 것.

그러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은 또 어떠한가 내가 알고 있는 가난 보다도 더욱 과장되게 어둡고 척박하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미화는 왜곡이 아니라 시선이다.


박물관에서, 깨진 기왓장의 아름다운 무늬와 수막새의 순수한 꽃무늬를 보았을 때 감탄 했던 적이 있다.

지붕 위에 있으니 볼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터인데

보이지 않는 곳에도 아름다운 모양을 새겨 넣은 정성이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진정 예술이란. 보이지 않는 것 하나하나에도 정성을 다 하는 것이구나 생각했다. 추수가 끝난 후, 아버지는 잘 말린 짚으로 이엉을 엮어 지붕갈이를 했다. 회색빛으로 시들어가던 초가지붕은 노오란 새 옷을 두르고 멀끔해졌다. 점 정성을 보태는 것 그것이 예술이었다.


'추수하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은 귀족의 저택을 장식한 그림이라고 한다. 귀족에게 소박한 삶의 형태를 충족하고픈 욕망을 채워 주었을 것이다. 나는 이 그림에서 평안을 찾는다. 이제는 현실에서 만날 수 없는 광경이기 때문이다. 고된 노동의 열매와 찌개미를 먹고 자라난 나는, 이제야 그럴 만 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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