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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05. 2023

선택적 묵언 수행


 


                  


 어젯밤에 핏물을 빼느라 물에 담가둔 돼지갈비를 손질했다. 체에 밭쳐 핏 물을 쏟아 버리고

한참을 헹구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고, 살코기 사이의 지방을 잘라 내었다. 큰 냄비에  큼직하게 썰어 놓은 야채들과 갈비를 넣고 양념을 하여 재워 놓았다. 뒤늦게, 아차차 하며 사과 한 알을 급하게 갈아서 주물 주물 했다. 삼십 프로 세일을 한덕분에 사 온 돼지갈비였다.


밥상을 차리고 남편을 불렀다. 식탁 앞에 앉은 남편은 대전의 둘째, 셋째 형님 부부가 강원도 계곡 펜션 어딘가로 놀러 가서 우연히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냄비를 열고 갈비를 한국자 푸는데 뜨거운 김이 가슴팍을 확 덮친다. 툭 하고 튀어나올 퍽퍽한 말들을 냄비 속에 지그시 눌러 두고 뚜껑을 덮었다.


대전의 둘째와 셋째 형님네는 사이가 좋아서 종종 휴가도 함께 보내곤 한다. 전에 함께 여행 갔던 장소에 따로 갔다가 만난 모양이었다. 두 아주버님들은 아내에게 자상한 사랑꾼 남편들이다. 아무 상관도 없이 그들이 미워졌다. 남편은 유튜브를 틀어 놓고 여유롭게 늦은 아침을 먹기 시작한다. 코 앞의 사람에게는 관심 없고 유튜브 속 세상에 만연의 웃음을 지으며 밥을 먹는다. 나는 남편과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


큰 딸이 전화를 했다.

카톡을 했는데 엄마가 확인을 안 하니까 전화를 한 것이다. 같은 집, 자기 방에서. 어젯밤 잠이 안 와서 새벽녘에 잠들었단다. 잠을 세 시간밖에 못 자서 학원에 못 가겠다고  아빠가 들을세라 모기 만하게 속삭인다."그래 좀 더 자라, 푹 자라"했다.

낮에 그렇게 자니  밤에 잠이 올리 만무이다. 밤새 동영상 시청하느라, 커뮤니티에서 세상을 읽느라 바빴을 게다. 주 3일 가는 수업 중 하루를 지겠다는  말이었다. 어쩌랴, 나는 잔소리를 꼭 꼭 접고 또 접어서 앞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뒷 베란다로 나가서 손빨래를 했다. 수돗물을 콸콸 틀어 놓고 비누거품을 푸짐하게 냈다. 몇 분 후 큰딸은 좀 더 자고 저녁에 있는 영어수업은 가야겠다고 톡을 했다. 같은 집에서도 톡을 하고 전화를 하다니, 이러다가는 집안에서도 영상 통화 하는 날이 있겠구나 생각하는 요즘이다.

적절한 거리 두기가 필요한 나로서는 나쁠 것도 없지 싶다.


A를 잃었어도 B까지 잃지 말자가 근래 나의 중심 문장이다. 아마도, 근심 어린 잔소리 폭탄을 투하했다면, 아이의 분노는 활화산처럼 타오르고, 방문은 철옹성처럼 잠길 것이고, 뜨거운 화산재가 집안을 잿빛으로 물들이며 잠식했을 것이다. 잔소리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책임에서 자유롭게 해 준다. 값을 치렀다고 생각하게 한다.


나는, 선택적 묵언 수행 중이다. 잔소리를 안 함으로써 그들 행동의 결과는 자신 안에  머무르게 되고 자신의 공은 자신이 굴리도록 한다.

 나는 내 것이 아닌 남의 공을 들고 얼마나 휘졌던가.


남편에게 "형님들은 그렇게 여행도 잘 다니는데 당신은 휴가가 다 끝나가도록 가족들 데리고 어디 갈 생각도 안 하느냐"라고 하면"재수하는 애 데리고 어디 가려고 "라고 할 것이고"재수생은 사람도 아냐?" 하면"어디를 그렇게 가고 싶어 안달이야"할 것이고 "당신 같은 인간이랑은 아무 데도 안 갈 거야"라고 소리를  지르면 "밥 먹는 데 왜 들볶냐"라고 할 것이고"나는 맨날 밥만 하냐"할 것이고 잠에서 깬 둘째가 "왜 또 싸워"하면 "너네 엄마가 괜히 저래"할 것이고 둘째는 "아빠가 잘못이야, 다 아빠 탓이야! 아빠가 언제 우리 가족 데리고 어디 한번 제대로 놀러 간 적 있어?" 하며 훌쩍이며"우리 집은 맨날 왜 이래"할 것이고 "아 이놈의 집구석"이라며 남편은 숟가락을 내팽개치고 방문을 쾅 닫을 것이다. 얻은 것도 없이 전쟁이 끝날 것이다.


그 모든 시나리오를 다 삭제하고,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 봐야 아나,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자. 아이들의 식탁을 차리고 상보로 덮어 놓았다. 늦잠에 빠져있는 아이들과 만족 스런 식사를 끝내고 컴퓨터에 빠져있는 남편, 고요 속에 잠긴 집을 뒤로하고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나온다. 밖은 한낯의 여름이다.


어쨌든, 오늘도 선방이다. 책 보따리, 말 보따리를 들고 찾은 카페는 더없이 시원하고 넓고 쾌적해서 열기를 식혀 주기에 맞춤이다.

하늘은 높고 구름은 폭신하다. 나는, 나만의 공을 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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