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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07. 2023

즐거운 상상

주말 아침, 사부작사부작 아침 준비를 한다.

어젯밤 끓여둔 짬뽕탕을 한번 더 데우고 쌀을 씻어서 밥을 새로 안쳤다. 백미 한 공기, 현미 한 줌, 귀리, 찰 보리 한 줌씩 씻어서 물을 맞추고 잠깐 불려 놓는다. 아침부터 덥다. 엄지발가락으로 선풍기 버튼을 눌러서 세기를 높인다. 현미 쌀 한 공기를 씻어서 작은 밥솥에 안친다. 현미는 물을 넉넉하게 잡아야 한다. 나와, 큰 딸이 먹을 현미밥이다.


냉장고에서 늙은 오이를 꺼내어서 껍질을 까서 얇게 저미고, 구부려서 굵고 길게 채를 썰었다.

양파를 채 썰어서, 늙은 오이와 함께 굵은소금을 뿌려 절여 두었다. 오이가 절여지는 동안, 냉동실에서 조기 세 마리를 꺼내, 칼로 비늘을 긁어내고 주방 가위로 지느러미를 잘라 냈다. 달구어진 팬에 기름을 두르고, 키친타월로 감싸 물기를 뺀 조기를 가지런히 넣고 뚜껑을 재빨리 덮었다. 팬에서는 탁 탁 탁 물기 튀기는 소리가 난다.


아침 내 나는 침묵 속에서 수많은 시나리오를 써보는 중이다. 내가 썼다가 지우는 시나리오는 인생의 역작이 아니다. 치졸하고 단순한 졸작이다.

잠들어 있는 남편을 살살 흔들어 깨운다. 나: "아침 먹어야지 "

남편:"자는데 왜 깨우고 그래! 아침은 나중에 먹을게"

나: "우리 가까운 호수로 드라이브 갔다가, 코다리찜 먹고 올까?"

남편:"끄응, 자는데 왜 깨우고 그래! 코다리찜은 무슨!  뜬금없이"

나: "당신 휴가도 끝나 가는데, 같이 바람 좀 쐬고 오면 좋잖아?"

남편:"아! 더운데 어딜 나가! 그냥  시켜 먹든가!"

보통은 여기서 대화가 끝나겠지만, 아니, 이런 대화를 시작도 안 하겠지만, 지금은 내 머릿속에서 상상하는 것이니 내 맘대로 대화를 끓고 간다.


니: "당신은, 부인이랑 나가는 게 그렇게 싫어?"

남편:"왜 또 시비야! 남편은 뼈 빠지게 돈 버느라 기를 쓰고 다니는데, 꿈속에서 살아? 한가하게 나들이나 가자고 하고! 십원 한 장 못 버는 주제에 돈 쓸 궁리나 하고!"

나: "내가 언제 한가하게 돈 쓸 궁리나 한다고 그래! 나도 아끼고 살잖아! 당신이 언제, 나랑 나간 적이나 있어?"

남편:"내가 노느라 그랬어? 나도 벌어먹고 사느라 그런 거잖아!"결국엔 이렇게 전개될 것이고 이런 시나리오는 삭제 버튼을 ' 욱' 누른다.


팬 뚜껑을 열고 노르스름하게 익은 조기를 뒤집는다. 내가"여보, 우리 산에 갔다가 보리밥 먹고 올까?" 하면 남편은 "또 무슨 산이야!" 할 것이고 "산에 가면, 공기도 좋고, 건강도 좋고, 땀 빼고 나면 기분도 좋아지잖아! 가까운 데로 갔다 오자 응?" 하면 "주말이라 사람 많아!" 할 것이다.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 같이 가자! 간단한 요깃거리 싸가서 산에서 먹어도 좋잖아!" 하면 남편은"너나 가! 너는 노후 걱정은 안 하냐?"노후 걱정이 나오면 대화는 끝이고, 이 역시 삭제 버튼을 누른다.


오이가 다 절여져서 두 손으로 꼭 짜서 물기를 빼고, 고추장, 참기를, 파, 마늘을 넣고 통깨를 뿌려 무쳐낸다. 밥 상을 차려 놓고 상보를 덮어 놓았다. 그동안 나는 수많은 시나리오를 삭제하며 살아왔다. 누군들 안 그렇겠는가? 어쨌거나 자명한 것은 남편을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여름을 흘려보내지 않기로 선택했다는 사실.



'똑 똑 똑'

카페에서 책을 읽다가, 글을 쓰다가 하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 앉으며 테이블을 두드린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남편이다.

남편:"여기 있었네, 뭐 해?"

나:"책 좀 읽고, 글 좀 쓰고 있지"

"무슨 책이야?""이거? 시집이랑, 글쓰기 책이랑"

"아, 요즘 이런 책 읽어? 무슨 내용이야? 재밌어?""재밌기도 하고, 이 시인은 내가 좋아하는 시인이잖아""그렇구나, 여기 에어컨 빵빵하다! 되게 시원하네""그렇지? 커피도 싸고 좋지?""그러네, 가까우니 좋고, 춥지는 않고?""좀 춥기도 하네! 여름에 춥다니 웬 호사야. 큭큭!""그러게 허허""차려놓은 밥은 먹었어?""응, 노각 무침 맛있더라! 비벼 먹었어""저번에 집에 갔을 때, 어머님이 주신 거야""그랬구나, 어쩐지 싱싱하고 맛있더라고""내가 솜씨가 좋아서 그렇지""그렇긴 하네""여기 이런 구절이 있어!""음.... 그러네""저녁에는 삼겹살 구워 먹을까?""그러지 뭐"

이런 대화, 평범하고 나직한 대화는 남편과 나눈 적이 없다. 상상만 해보는데도 즐겁다. 작은 대화를 나는 사랑한다.


나의 상상의 날개는, 두 팔 무겁게 장을 보는 팔뚝에서, 이곳에 굳건하게 버티고 선, 딱딱한 각질의 발 꿈치에서, 고춧가루 묻은 콧잔등에서, 돋아난다. 오늘의 나는, 멸치국수와 꼬마김밥으로 맛난 점심 먹고, 동네 한 바퀴  하고, 두 팔 무겁게 장을 봐서, 저녁을 지을 것이다. 갈치조림 냄새를 따라가다 보면 창밖에, 꽃처럼 고운 노을이 걸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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