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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Sep 10. 2023

나 홀로 결혼기념일

예전에 나는, 가을을 참 좋아했다.

가을날의 말갛게 닦인 햇볕을 사랑했다. 단풍이 물들면  속에 끼워서 곱게 펴서 말렸다가 코팅을 해서 오려서 책갈피로 쓰거나 엽서로 쓰곤 했다. 가을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결혼식을 9월에 한 것도 가을의 시작이니 잊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내 맘엔, 아직 반팔 티를 입을지라도 9월 1일부턴 가을 시작이다. 결혼 이십일 년째, 한 번도 결혼한 날을 기념한 적이 없다. 과부도 아닌데 늘 나 홀로 결혼기념일이다. 영 잊고 살면 속편 할 텐데 꼭 하루 전이나 당일에 촛불을 켜듯 떠오른다.


달이 휘영청 밝다.

건너편 생맥주 집에는 사람들의 물결이 출렁인다. 더위가 한풀 훅 꺾이고, 아침저녁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이다. 건너편을 바라보며 세상에는 외롭지 않은 사람이 왜 이리 많은 거야, 입 속 말로 중얼거려 보았다. 저들은 무슨 비법이 있어서 저리 왁자지껄 웃을 수 있을까? 사랑에도 자격증이 있어서, 태어 나는 순간부터 ,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한번 정해지면 영원히 받지 못하는 것일까? 유치한 생각도 해본다.


마트에 들러서 약간의 장을 보았던 터라 어깨에 둘러맨 장바구니가 조금씩 흘러내린다.

외롭다고 쓰면  쓸쓸해서, 외롭다고 쓴다. 아이들에게는 결혼기념일도, 챙김 받지 못하고 사는 엄마로 기억되기 싫어서 말을 안 한다. 특히 큰딸은 자신의 운명을 엄마의 에 덧대는 경향이 강하므로 비껴 서서 모른 척 지나간다. 오늘은, 달이 밝으니 막걸리 한잔으로 축배를 들고 지나가련다.


남편에게는'너 같은 거'하고 엮인 날이니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다정한 부부로 살아 본 적이 없으니 기념일을 축하한다는 것은 커다란 위선이다.

나에게는 사랑하는 아이들을 만나게 해 준 중요한 의미가 있는 날이다. 잘 지나왔다고 다독다독 해준다. 나를 끈질기게 여기에 있게 한 세월이다.


앞의 부부가 장바구니를 나눠서 매고,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간다.

내가 평생을 두고도 가질 수 없는 그림이다.

가끔 둘째와 마트에 다녀오다 이런 광경을 보면 나를 돌아보며"엄마! 부럽지?" 한다.

"우리 딸이 있는데 뭐가 부러워! 저 사람들 봐봐! 다 엄마 부러워하잖아! 이렇게 예쁜 딸이 있으니까!"나는 이렇게 진심을 담아 넉살을 떤다.


전철역 입구 벤치에 앉아서 달을 본다. 금요일 밤이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여럿 지나다닌다.

이런 순간 기다릴 사람이 있어서 좋다. 가만히 앉아 있으니 모기가 와서 발목을 자꾸 문다. 가을 모기는 쪼그만 것이 독하기도 하다. 바지와 양말 사이  드러난 맨살을 어떻게 그렇게 잘 찾을까? 일어서서 왔다 갔다 움직이는데, 출구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올라온다. 목을 길게 빼고 본다. 큰딸의 모습이 보인다. 딸은 작은 손을 귀엽게 흔들며 다가온다."잘 다녀왔어? 피곤하지?"내가 다가가며 손을 내민다. 눈이 퀭하고 얼굴이 홀쭉해진 딸아이는 내 손을 꼭 잡고 "오늘 학원에서...."로 시작되는 쫑알쫑알 긴 수다를 시작한다.



재수생인 큰 딸아이, 이란 언제나 다시 재건할 수 있는 것, 나는 안심한다. 딸아, 엄마처럼 살아도 멋지단다. 그러니 엄마처럼 살기 싫다고 수고롭게 도망치지 않아도 된단다. 안심하렴.

 오늘이 쓸쓸하지 않을 이유, 우리는 함께 각자 자기의 짐을 메고 걸어가며, 풀벌레 소리 요란한 밤, 가을을 마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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