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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생태

by 그방에 사는 여자

마음을 버리러 산에 갔다.

버스에서 내려 비탈길을 올라갔다. 저수지의 산그림자와 윤슬이 발 길을 이끌었으나, 이내 산 쪽으로 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오후 3시 30분 좀 늦은 시간에 도착했으니 해지기 전에 산에서 내려오려면 서둘러야 할 듯싶었다. 몇 군데 가파른 계단이 있기는 하나 완만한 능선이 이어지는 산은 천천히 걸어도 봉우리까지 대략 한 시간, 하산까지는 두 시간 정도 걸리니 적당한 마음으로 올라도 좋은 산이다.


첫 번째 계단을 오르고 나니, 평평한 숲길이 이어진다. 녹음의 산은 여전히 풍성하고 변함이 없었다. 저마다 버려두고 오는 마음들 때문에 산은 더욱 울창해지는 것인가. 흘린 땀과 상념들이 비벼지고 묵혀져서, 삭아 거름이 되어 나무가 자라기 알맞은 땅이 되어 가는 것인가. 어쩌면 애초에 알맞은 땅이란 없었을 것이다. 그냥 거기에 생겨 났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을 게다.


소설가 김 금희는 산문집 ' 식물적 낙관'에서 말한다. '환경에 적응하는 것, 성장할 수 있다면 환희에 차 뿌리를 박차고 오르는 것, 자기 결실에 대한 희비나 낙담이 없는 것, 삶 이외의 선택지가 없는 것, 그렇게 자기가 놓인 세계와 조응해 나가는 것, 이런 질서가 있는 내일이라면 낙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나무들을 둘러본다. 큰 나무 아래 중간치의 나무, 작은 나무 그 밑에 좀 더 작은 나무 그리고 작은 나무의 발치에는 보드라운 풀잎이 사이좋게 흔들리고 있었다. 저쪽이 햇 볕이 더 잘 든다고 자리를 옮겨 앉을 수도 없으니, 가지 끝만 나부끼다가 스스로 잦아든다. 숲은 조용한 애씀의 터전이다.

나무로 사는 일, 고단 하다.



산에 오면, 꼭 햇볕이 잘 들어야만 식물이 잘 자라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늘에서도 자랄 생명들은 잘 자라서 숲을 이룬다. 오히려 바람이 잘 통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마음은 밭이다. 내 버려두면 어느새 잡초로 뒤덮여 작물이 영글지 못하듯이, 마음도 때때로 솎아내고 버리지 않으면, 벌컥 버린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시들어 가기 마련이다. 내가 산에서 얻는 것은. 김 금희의 문장 '울면서 세세히 말하지 않아도 마음으로 전해지던 그 선선한 동의'같은 것들이다.



'생태'는 천경자가 한국전쟁 시기에, 고통의 한가운데서 인생에 저항하는 마음으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 뱀을 그릴 땐 괴로움밖에 내게 남아 있는 것이 없었을 때였습니다".라고 천경자는 말했다. 고통을 고통으로 상쇄하듯 그린, 뱀은 질식할 듯 꿈틀거린다. 똑바로 들여다보면 나는 욕망하고, 비겁하고 또한 미천하고 추잡하다. 진실은 어찌 보면 그런 것이고, 내 속엔 그런 것들이 우글 거린다.


한 걸음 한 걸음 숨찬 계단을 오르는데 누군가 그 계단을 뛰어서 올라갔다. 남색 스포츠 반 바지와 빨강 티셔츠 차림의 키가 제법 커서 170센티미터는 되어 보이는, 머리가 하얀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종아리는 그 나이대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한 근육질이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운동으로 몸을 단련해 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몸의 이력이었다. 내 뼈에 붙어 삶을 지탱해 주던 근육들은 어떤 나이테를 만들었나. 팔 뚝의 힘 줄은 우툴두툴 푸른 뱀처럼 솟아나고 얼굴의 주름은 늘어진 지도처럼 새겨진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며 문득, 표정이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삶을 낙관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얼굴을 갖고 싶다고.



올라가는 내내 내려오는 사람만 보였다. 늦게 출발한 것일까? 걱정이 되어 걸음을 서둘렀다.

막바지 가파른 계단을 숨을 몰아 쉬며 올라갔다. 다 오르니 계단의 숫자가 434개라는 푯말이 있었다. 정상 봉우리에는 아이스박스에 담긴 생수와 캔 맥주를 파는 남자가 혼자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스산한 마음을 버리러 오는 이곳이 그에게는 전장이었다. 이것이 생태이고 생의 톱니바퀴다. 나는 돌무더기 위에 앉아 먼 곳을 잠깐 응시하다, 다른 사람들이 더 올라 올 기미가 없자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어서 서둘려 내려왔다. 그러나 내려오는 길목에서는 올라가는 사람들을 여럿 마주쳤다. 결국은 나도 그다지 늦은 것이 아니었다.


산을 내려와 저수지 옆 벤치에 앉았다. 내가 풀어놓은 마음들에 대하여 생각하며 그것은 하찮은 것들이 아니라는 것을 애써 환기시켰다.

산은 조용히 꿈틀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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