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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둘째가 주민등록증을 만들었다.

신청 안내서는 거의 일 년여 전에 나왔는데 사진 찍는 것을 미루고 미루다가, 막바지에 이르러서 벼르던 만큼의 화장도 못하고 대충 사진을 찍었다. 사진은 참 예뻤으나 아이는 맘에 들지 않는다며 빠른 시일 내에 바꿀 것이라고 했다.

주민 센터에서 지문을 입력하는 딸을 보고 있자니 아이를 낳아 키우던 날들이 마치 전생의 기억 마냥 아득하게 느껴졌다. 시간이 확 이동하여 모든 페이지가 사라진 듯 처음과 지금만이 있었다. 내년이면 정말로 육아에서 굵은 매듭을 짓는 것이다.



큰 딸이 처음으로 제가 번 돈으로 어버이날 선물을 했다. 꼬박 7시간씩 3일은 서서 일해야 버는 액수의 화장품 세트였다. 그동안에도 어버이날 선물을 하기는 했으나 그때는 용돈으로 충당했었다. 주황색 포장지로 예쁘게 포장을 하여 주황색 종이 가방에 꼼꼼하게 넣은 선물을, 뜯기 아까워서 아직도 풀지 못했다. 딸 앞에서' 여기저기 막 자랑 해야겠다!' 며 호들갑을 떨며 사진을 찍었다.



세월은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망설임 끝에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성장해 오는 것이었다.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아이의 좌절 앞에서 애써 태연했었다. " 예전에는 엄마가 알아서 해결해 주겠지 하며, 엄마 뒤에 숨어버리면 그만 이었다면, 이제는 링 위에 나 홀로 올라 간 느낌이야" "내가 그냥 부속품이 된 것 같아, 마치 고유한 인격이 없는 사람으로 나를 보는 것 같아"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큰 딸이 뱉어 내던 말들이다. 나는 "힘들면 그만둬도 괜찮아, 지금 하는 일이 잘 안 맞아도 다른 일을 더 잘할 수도 있어"라고 말해주고는 했다. 아이는 난생처음을, 감당하고 익히며 잘해나가고 있다. " 아, 오늘은 제발 손님 좀 없어라" 하며 나가서는, " 손님 진짜 많았는데, 손이 엄청 빨라져서 밀리지 않았어, 사장님께 칭찬 들었어" 라며 돌아온다. 세상에는 그냥 사는 사람은 없다며, 수많은 개인들이 톱니바퀴로 맞물려서 돌아가는 세상에서 겸손해지고 충만해지는 하루를 살아 나가고 있다.


나는 오늘, 혼자 뷔페에서 밥 먹기에 도전했다.

원래 혼밥을 잘했으나, 뷔페에서 혼자 밥 먹기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쥐어 봐야 한 줌인 관계에서 매번 약속을 잡는 것도 한계가 있으니,

혼자 뷔페에 가보면 어떨까 생각만 하다가 그냥 생각 없이 실행에 옮겼다. 지인들은 대부분 소식좌이고, 남편과 아이들은 뷔페를 좋아하지 않는다. 물론, 내가 간 곳은 호텔 뷔페가 아니라 이만 원의 가성비 좋은 곳이다.

"몇 분이세요?"

"한 명이요" 검지 손가락을 곧게 펴서 보이며 대답했다. 직원이 안내해 준 자리가 너무 출구 쪽에 위치해 있었다. " 혹시 안쪽에 칸막이가 있는 자리에 앉을 수 있을까요? 자리가 있는 것 같은데요" " 아, 네 원래는 안되는데, 지금은 자리가 여유가 있으니 바꿔 드릴게요" 직원이 친절하게 말했다. 물 한잔을 미지근하게 마시고, 샐러드부터 시작해서 먹고 싶은 음식을 다양하게 먹었다. 넷플릭스에서 음량을 줄여놓고 영화를 보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혼자서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서너 명은 되어 보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밥법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듯 작은 도전으로 나는, 좀 더 넓어지고 친절해질 것이다.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 문을 열고 또 다른 교집합을 찾는, 압도적인 벽 앞에서도 푸른 하늘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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