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도는

by 그방에 사는 여자




고요한 기도. (유 명숙. 2025)



그새, 연꽃이 삐죽 높게 올라와 있었다. 지난달에 보았을 때는 연잎만 무성하고 꽃 봉오리가 맺힐락 말락 하였다. 연꽃이 줄기를 쭉 뻗고 올라가서 잎이 다 떨어지고 꽃술만 남기도 하였고, 간신히 꽃잎 두 세장이 매달려 있기도 하였다. 일주일 전쯤에라도 왔다면 하얀 연꽃을 보았을 것이다. 저렇게 높게 피었나 싶게, 푸르고 무성한 연잎 위로 꽃대가 쑥 뻗어 올라가 있었다. 절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돌확이 아닌, 땅속에 깊이 묻힌 커다란 고무 대야에 연꽃이 심겨 있었다. 도심의 한편에 자리 잡은 위치만큼이나 겉치레보다는 그것의 쓸모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닐까. 어쨌거나 무성한 연잎에 마음이 시원해졌다.



양말과 우산을 파는 잡화점 왼쪽 건너편 칼국수집을 지나 일주문으로 들어서니 아담한 안마당을 품고 있는 사찰 경내가 나타났다. 젊은 날 수도 없이 쏘다녔던 거리들,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자주 가던 영화관도 근처의 골목에 있었다. 경찰이 꿈이었던, 초등학교 4학년이던 조카를 데리고 영화 '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보았던 영화관이었다. 영화 ' 파고'를 볼 때 조카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곯았다. 햄버거와 콜라와 감자 튀김을 깔끔하게 먹고난 뒤였다. 장성한 조카는 경찰이 되었고, 결혼도 하였고 딸을 둔 아빠가 되었다. 쇠락해 가는 거리의 시간들이 수증기처럼 증발하는 사이, 아이는 자라나고, 나는 나이 들었다. 젊은 날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다가 이제야 절에 발걸음을 했다.



안내소에서 커다란 양초 세 개와 지퍼백에 담겨 있는 쌀을 샀다. 스티커 용지에 이름과 태어난 해와 바라는 바를 적었다. 지난달에 왔을 때에는, 이따금 산행길이나, 관광지에서 절집을 찾기도 하였으나, 일부러 찾아온 것은 처음이라서 긴장도 되고 서툴렀다. 노란 티셔츠를 헐렁하게 입고 머리를 틀어 올려 커다란 집게 핀으로 고정시킨, 사십 대 안팎으로 보이는 안내소 여자에게 일일이 물어보았었다. 이번에는 한번 와봤다고 스스럼없이 초를 사고 스티커를 붙였다.



문지방을 넘어가 댓돌 위에 벗어둔 샌들을 신고 마당을 가로질렀다. 돌계단을 올라가 '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라고 쓰여 있는 탑 아래 촛불 이 여러 개 켜져 있는 유리 칸막이 안에 초 세 개를 나란히 세워 놓았다. 유리 칸막이 안은 뜨거웠다. 토치로 불을 붙였다. 여전히 그곳에는 누군가의 염원들이, 한 낯의 작렬하는 열기를 머금고 조용히 타오르고 있었다. 양산을 쓰고 얼마동안 서서 초들을 바라보았다. '극락왕생'이라고 쓰인 초들도 보이고, 두 사람의 이름을 적은 초는 '좋은 인연'을 바라고, 건강기원, 합격, 또는 병의 쾌유를 바라는 마음들이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들의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지극히 평범한 마음을 적어서 초를 밝혔다. 지난달에는 아이들의 초만 켰는데 이번에는 나를 위한 촛불도 켰다. 염원이란 항시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다. 나를 위한 촛불을 밝혀 본 것은 처음이었다.




지난달에 사진을 찍어 아이들에게 보냈을 때, 아르바이트로 바쁜 큰 딸은 답이 없고, 둘째는 '대박' '엄마 것은 없어? 엄마 것도 빌어야지'라고 답장을 했다. 이번에는 내 것까지 초를 밝히고 사진을 찍어서 아이들에게 전송했다. 우리는

때때로 마음 보다도 형식을 기억하기도 한다.

그래서 생일을 기억해 케이크에 나이만큼의 초를 밝히는 것이고, 나물을 무치고 탕국을 끓이고 향을 피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담아둔 마음을 표현할 때 빛이 난다. 아이들에게 너희를 위해 엄마는 촛불을 켠다고 보여 주었다.




다시, 계단을 올라 대웅전으로 향했다. 중년의 남자가 법당 미닫이 문을 열고 나왔다. 법당 안에는 누군가 올렸을 쌀들이 쌓여 있었다.

지퍼백에 담긴 공양미를 올려놓고 절을 세 번 했다. 불교 신자가 아니니 모르면 모르는 데로 깜냥껏 했다. 잠시 서 있다가 법당을 나왔다. 대웅전 앞마당 난간에 서서 내려다보니 오래된 시가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날은 더운데 하늘은 맑고 쾌청했다. 마이크와 스피커가 설치되어 있는 걸 보니 평소에는 스님의 설법을 듣는 장소인 듯했다. 영원과 찰나 사이에는 얼마의 시간이 있을까? 도무지 모르겠다. 다음에는 설법 시간에 맞춰어 와서 공부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이를 먹고 모르는 것들이 자꾸만 쌓이니, 안 해보았던 일을 해보는 것도, 안 가본 곳을 가보는 일이 어렵지가 않다. 모르면 물으면 된다.




나 역시, 누군가의 소리 없는 기도로 이렇게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기도와 고요한 염원이. 불행을 작은 고난으로 바꾸고, 곤란함 속에서 나를 구했을지도 모른다.

자식을 둔 어미는 생 그 너머의 것을 염원하였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덜컥 밀려든다.

화가는 '고요한 기도'를 그리면서 어떤 기도를 하였을까. 새벽의 하얀 십자가는 은은한 광체를 띠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입을 다 떨군 나무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고요한 겨울의 새벽을 지키며 서 있다. 나무는 그저 거기에 있을 따름이다. 나무에게는 원망이나, 바라는 마음이 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만큼 존재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나의 기도는 나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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