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범

by 그방에 사는 여자

낌새는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기는 있다.

하필이면. 가벼운 양산을 쓰고 산책을 나갔고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양산은 강물에 빠저 버리고 말았 건 만 남자는 태평하게 바라보고만 있으니 난감한 일이다. 하얀 치마와 블라우스가 젖는 것을 감수하고 강물에 뛰어들거나, 그깟 양산쯤은 버려두고 걸어가야 할 것이다. 상실의 순간을 지나가는 미묘함에도 평화는 있으니,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견디는 것 밖에는 길이 없을 것이다.


"제수씨, 하, 살이 좀 찌셨네.... 얼굴이"

막 식탁에 앉으려던 셋째 아주버님이 두 손으로 얼굴 받침을 만들며 눈빛을 반짝이며 웃는다.

하, 씨, 또 시작이다. 먹잇감을 발견한 천진한 웃음. 역시 알아본 것이다. 염색할 날짜를 넘겨 희끗하게 비치는 정수리의 흰머리와 부스스한 반곱슬 머리를. " 살은 안 쪘어요, 몸무게는 그대로 예요. 좀 부었나 봐요" 아침부터, 집에 있을 아이들의 밥을 준비해 놓고 나오느라 바빴다. 어젯밤에 재워 놓은 갈비찜도 한 솥 끓여 놓고 국도 새로 끓이느라 드라이도 제대로 못하고 달려온 시댁이었다. 남편이 던진 살점을 부인이 날름 받아서 뜯는다. " 부었어도 지금이 훨씬 낫다 야, 지난번에 보니까 주름이 확 져서 폭 파여서 골이 지더라." 포크로 배를 찍어서 우물거리는 그녀의 턱살이 출렁거렸다. 어떤 악의는 유아 적이라 자신도 눈치채지 못한다. 결혼한 후로 내가 꼬박꼬박 '형님'이라 칭하며 존대를 하는 그녀는 나와는 동갑이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애처가인 그녀의 남편은 그 사랑의 방편으로 집안에서 가장 서열이 낮고 만만한 나를 교묘하게 불편한 감정으로 만든다. 나는 한껏 찌푸려 내 천 자를 이루는 그녀의 미간을 바라봤다.

" 형님은 미간에 보톡스 좀 맞아야겠어요!"

나는 웃었다.

"그래도 막내 동서는 이 정도면 탱탱한 거야. 날씬하고 주름도 없구먼"

옆에 있던 큰 형님이 웬일인지 내 편을 든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자신을 애도하며 그 식탁에서 그대로 늙어 온 큰 형님은 내가 그녀의 식탁에서 뜯기고 있을 때 대부분 한 발을 빼고 방관을 했었다.



"형님, 오늘따라 어머님 말씀이 없으시네요"

다른 사람들은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고, 식탁에는 큰 형님과 둘이 마주 앉아 차를 마실 때 내가 말했다.

"야, 말 마라. 엊그제 또 한바탕 했다"

"아..."

"내가 이 나이에 아직도 욕을 먹고 산다"

형님의 나이는 65세, 어머님은 89세, 어머님은 아직도 기운이 좋으시다. 효자 아들 덕분이다.

거실에서 들을 새라 소곤소곤 말하는 형님의 목소리는 너무도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TV에서는 노래가 한창 이었다.

왕년의 유명한 여자 트롯 가수가 나와서 아이돌 후배들과 함께 열창하고 있었다.

"재도 많이 늙었네, 살도 찌고" 소파의 누군가 말한다. 또 그놈의 살 타령이다.

"그래도 노래는 역시 잘해"

"저 정도면 그렇게 살찐 거 아니에요. TV라 더 크게 나와서 그렇지, 저 얼굴 탱탱한 거 보세요. 늙지도 않네요" 내가 말했다.

"아유, 얼굴 땅기고 뭐 넣고 다 했겠지, 돈도 많을 텐데" 셋째 형님이 말했다.

"재들 이야 팔자 좋지 뭐" 큰 형님 말에

" 저 사람들도 힘든 거 많을 거예요" 내가 말했더니 "그래도. 내 팔자보다는 좋지 뭐" 큰 형님의 목소리가 한 뼘 올라갔다.

"형수님 팔자가 뭐 어때서요" 셋째 아주버님이 말하자, 큰 형님의 목소리가 전에 없이 커졌다.

"요즘 세상에 나처럼 사는 사람이 어딨어요 옷!"

집안은 일순 정적이 감돌았다.

소파에 앉아있던 큰 아주버님이 검정 안경 너머로 큰 형님을 흘겨보며 "쓰읍!" 소리를 냈다.

형님의 사십 년 가까이 되는 기나긴 시집살이를 견디고도 넘칠 만큼 자상한, 늙어 가는 아내를 아끼는 큰 아주버님에게서는 못 보던 모습이라 적잖이 놀랐다.

그 와중에 평화로웠던 것은 어머님 방에서 자고 있던 남편이었다. 남편은 늘 그렇듯 몰랐고, 몰라도 되었다. 큰 집을 나섰을 때는 겨우 오후 두 시를 넘기고 있었다. 과거의 침전물들이 오늘을 잡아먹으려 달려들어 침범당하기 전에 도망쳐야 한다. 낌새는 있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기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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