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널목의 신호등이 빨강이다. 잠깐 멈춰야 한다.
건너편 길에는 빨강 윗옷을 어깨에 두른 여자가 지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약간 굽은 등을 빨간 니트가 덮고 있었다.
“언니, 나이가 드니 등이 왜 이렇게 시릴까, 예전에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조끼를 좋아했는지 이제 알겠네” 언젠가 지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이보리색 모자를 쓴 여자의,접어 입은 청바지 바짓단에는 꽃무늬가 그려져 있었다. 한여름의 진한 초록을 한 꺼풀 벗겨낸 길가 나무들은 연한 갈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가을볕을 한껏 받은 빨강은 따숩게 느껴졌다.
엄마는 빨간색 옷을 입지 않았다. 나이 들수록 원색의 옷을 좋아하게 된다는데, 엄마의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숭하다” 거나 “남사스럽다”라는 말로 퉁쳐지는 색들이 아닌, 주로 검정이나 어두운 베이지색 블라우스나 바지를 입었고, 검정 조끼를 걸쳐 입었다.
연 분홍 체크무늬 남방이 그나마 가장 화려한 옷이었다. 엄마의 생일에 정장 세트를 사드린 적이 있었다. 자주색 긴 플레어스커트와 아이보리 바탕에 자주색 꽃무늬와 리본이 달려 있는 스텐 카라 블라우스, 단순한 디자인에 허리가 잘록하게 들어간 자주색 재킷이 세트였다. 내 딴에는 큰 맘을 먹고 사드렸건만 엄마는 색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입지 않았다.
키가 크고 마른 편이었던 엄마에게는 잘 어울렸는데도 안 입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딸이 비싼 옷을 사 온 것이 마음에 걸리는가 싶었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들어도 딸이 애써서 사 온 건데 그냥 입으면 안 돼?”
“그 시뻘건 것을 창피해서 어떻게 입냐”
엄마는 평소에는 온화한 성격이었는데 어떤 면에서는 자식들 말을 좀처럼 듣지 않았다.
“나를 싫어하니까 내가 사 온 옷도 싫은 거지?” 유치한 소리에도 꿈적도 안 했다. 딱 두 번 그 옷을 입은 것을 본 적이 있었다. 한 번은 동네 아저씨를 문병하러 대학병원에 함께 갔을 때이고, 또 한 번은 결혼 전 나의 상견례 때였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어느 겨울날 논 바닥에 녹이 슨 양철 드럼통을 놓고 엄마의 옷들을 태웠다. 서랍장 안에는 박스도 뜯지 않은 내복들과 속옷이 그대로 있었다. 내가 사준 자주색. 정장도 새것인양 옷걸이에 고대로 걸려 있었다. 성냥불을 그어 도라무통 안에 던져 넣자 불길은 활활 타올랐다. 그것은 빨강보다 더 시뻘갰다. 잉걸불처럼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꺼지자 먼지 같은 한 줌의 재만 남았다. 그것은 껍데기였다. 양철 도라무통을 엎어서 재를 털어 냈다. 논 바닥에 쏟아진 재가 흩어질까 삽으로 흙을 떠서 덮었다.
긴팔 빨간 가디건을 걸쳐 입고, 통이 넓은 짙은 청바지를 입은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하얀 운동화를 신고 짝다리로 서있다가, 팔짱을 낀 팔을 풀어 검고 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십 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하얀 얼굴이었다. 좋은 시절이네, 나는 생각했다. 좋은 시절이건만 그녀는 피곤한 낯빛으로 핸드폰을 보다가, 버스가 오는지 저 멀리로 시선을 두고는 하였다. 버스가 도착하고 건너편에 앉은 그녀는 내내 핸드폰을 보다가, 여섯 정거장이 지나자 내렸다. 한 때는 나도 빨간색 옷을 즐겨 입었다. 첫 월급을 받고 처음으로 산 옷도 빨간색 자켓이었다. 고급스러움을 더한다고 금박이 입혀져 있는 단추를 달고 있었다. 그 자켓에 검정 치마를 입고 노란 개나라꽃 앞에서 찍은 사진은 앨범에 담겨 집안 구석 어딘가에 있다. 빨간 반팔 브이넥 니트에 회색 바탕에 검정 체크무늬 반바지를 입고, 동호회에서 진행하던 시화전에도 가고, 엄마와 함께 시내 시장에서 한복집을 하던 친척집에도 갔다. 한복집 아줌마는 “ 너는 이렇게 뽀얗고 이쁜데 니네 엄마는 저게 뭐냐, 보약이라도 해드려라” 말했다. 시골에서 일만 하던 엄마는 까맣고 말랐다. 내가 지은 보약으로 엄마가 뽀야질수 있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건, 인생에 관한 문제였으니 나로서는 풀 수 없었다. 하얗고, 뽀얗고 이쁜 건 젊음의 특권일 뿐이었고, 젊은 날의 대부분은 그 특권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지나간다. 누군가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을 때면 "보라색이요"라고 답하던 나는 꽤 오랫동안 빨간색 옷을 입었다. 감추고 싶은 것도, 들키기 싫은 것도 많아서 연한 색을 켜켜이 덮어 가릴 여유가 없으니 깊고 무거운 것을 강렬한 색으로 감추려고 했던 것이다. 빨간 장미를 좋아했던 이유도, 한송이라도 초라하지 않고 아름다워 서였지 않은가. 신혼여행 때도 빨간 셔츠에 빨간 배낭을 메고, 결혼 후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는 원색이 아기의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어디선가 읽고는 빨강 파랑의 면티를 입고, 기저귀 가방도 빨간색이었다.
창 밖을 보니 빨간가디건의 검정 머리 그녀가 역 앞에서 인파 속에 섞여 걸어가고 있었다.‘흔들리는 젊음이라도 아름답구나’ 생각하는데, 사진첩 속에 숨어 있던 그 시절의 내가 그 옆을 걸어가고 있었다. 단발 파마머리에 빨간 니트를 입고, 반 바지 밑으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고 있었다. 빛나도 좋았을 젊음이었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리는 시간, 앞에 앉은 여인은 빨간색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들고 축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 연 갈색으로 염색된 머리는 윤기가 돌고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진료를 마치고 나온 그녀가 다시 그 자리에 앉는다. 한참을 앞을 바라보던 그녀가 가방에서 알록달록한 손수건을 꺼내어 얼굴을 감쌌다. 나는 가만히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우는 걸까, 코를 푸나, 땀을 닦나, 손수건이라니, 그녀는 인생을 잘 꾸려 가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얼핏 보니 6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그녀가 어깨를 들썩인다면, 가만 손을 올려야 할까?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한 권한은 누구도 주지 않았다. 단지 오늘은 잠시 울고 싶은 그런 날일지도 모른다. 그녀가 집으로 돌아가면 저녁쌀을 씻어 밥솥에 안쳐 놓은 자상한 남편이 배를 내밀고 있을 것이고, 일주일 두어 번은 안부 전화를 하는 자식들이 있고, 매운 닭발에 소주 한잔 하는 친구가 가까이 있을 것이다. 누군가를 함부로 위로할 수 있다는 착각은 멈추기로 한다. 그냥 조금은 더 친절하면 될 것이다. 나는 가방 안의 휴지를 만지작 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