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시간이 지난 버스 안은 한산했다. 햇볕은 달리는 버스 안을 용케도 찾아 들어왔다. 노곤 한 잠이 밀려왔다.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주말이면 가방을 꾸려 버스를 탔다. 사당역이나, 강남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박물관도 가고 미술관도 가고
체험관도 갔다. 버스나 지하철 안에서, 집에서 씻어온 방울토마토나 껍질 깐 사과를 아이들 입속에 넣어주고 배낭에서 물티슈를 꺼내 아이들 손을 닦아 주었다.
도시락은 주먹밥을 주로 쌌다. 묵은지를 잘게 썰고, 양파와 당근 감자도 잘게 썰어서 볶았다. 꼭 빼놓지 않는 것이 오징어였다. 아이들이 오징어를 좋아했다.
오징어도 잘게 썰어서 다 함께 볶아서 커다란 양푼에 넣고 밥과 김가루, 통깨, 참기름을 넣어서 섞었다. 일회용 비닐장갑을 끼고 아이 주먹만 하게 둥글게 만들어서
랩으로 감싸서 스텐 통에 담아서 배낭에 넣었다. 그리곤 공원이나, 박물관, 아쿠아리움 휴게실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아이들은 요즘도 가끔 그때 먹은
도시락이 정말 맛있었다고 말한다. 배낭 안에는 찐고구마나, 삶은 계란도 항상 있었다.
전철역 화장실에서 볼일을 볼 때면, 호기심 많은 아이들이 밖으로 나갈까 봐, 내가 있는 화장실 문 안으로 발을 들이밀고 ‘일이삼사를 십까지’를 세고 있으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무슨 재미난 장난처럼 화장실 안으로 분홍색키티 운동화를 쑥 들이 밀고는 ‘킥킥’ 댔다. 나는 ”십"까지 세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아이들은 지하철 역에서 파는 델리 만쥬를 좋아했다. 델리 만쥬 한봉이면 서서 가는 지하철도 즐거운 놀이터였다.
사당역에서 내려 지하철 4호선으로 갈아타고 혜화역에 내렸다. 2번 출구로 나와서 맞닥뜨린 모습은 너무 많은 사람들이었다. 예상밖의 현장이었다.
이틀 전 우연히 ‘제43회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이라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예전에 친구와 대학로에 놀러 갔다가 우연히 백일장에 참여하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20대 초반이었을 것이다. ‘시‘를 써서 제출하였고 상은 타지 못했다. 신문사에서 나와서 취재를 했는데 친구와 인터뷰도 하고 사진도 찍었다.
다음날 가판대에서 신문을 사서 읽어 보았는데 우리들 사진은 없었다. 기사에는 ”20대 여성, 좋은 날 좋은 경험”했다는 내용이 한 줄 있었다. 백일장 사전 접수는 이미 끝났고, 당일 현장 접수 할 수 있다고 했다. 아침까지도 갈까 말까 하다가 ‘그래, 하루를 꽉 차게 살기로 하지 않았던가 ‘하며 나선 길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글 하나는 건지겠지 생각했다.
현장 접수처에 가니 원고지가 동이 나서 새로 가져와야 하는데 30분은 걸린다고 했다. 일단 현장 접수하고 기다리란다. 그때까지는 생각지 못했다. 예상보다 사람이 많아서 원고지가 떨어진 것이라는 걸. 마감 3시간 전인 11시에는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할 수 있을 걸라 생각했는데, 도착하니 12시였다. 많이 늦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벤치나 의자 카페 그 어디라도 사람들이 그야말로 바글바글 했다. 준비도 철저히 했는지 노트북에 돗자리며 물병, 담요 등을 챙긴 사람들이 여럿 보였다.
글제는 안경, 삐에로, 쓰레기, 달콤이었다.
감이 오지 않았다. 무엇으로 써야 하나 궁리를 하며 , 우선은 따뜻한 차를 마셔야 할 것 같아서 근처 카페에서 차를 주문했다. 따뜻한 얼그레이 티를 주문했는데 아르바이트생이 건네준 것은 얼음이 가득 담긴 차가운 차였다. “따뜻한 거 주문했는데요?”내가 말했다. “”차가운 거 주문하셨어요 “ 아르바이트생이 영수증을 검지로 짚으며 말했다. 돋보기안경을 쓰지 않아서 글씨가 흐릿했다. 서두르느라 가방 속의 안경을 찾지 않고, 흐릿하게 보이는 대로 터치한 것이다. 할 수 없이 차가운 얼그레이 티를 마셔야 했다.
영수증을 보며, 이것으로 글감을 잡자 생각했다. 눈이 좋았던 내가 나이 들며 노안이 와서, 이제는 돋보기를 꼭 챙겨야지, 안 챙기면 눈을 빼놓는 것이나 진배없으며
선글라스나 양산처럼 들고 다녀야 할 물건들이 늘어난다고 썼다. 고등학교 때는 멋을 부린다고 도수 없는 안경을 쓰다가, 눈이 욱신거리고 아파서 나중에는 알은 없고
테만 있는 안경을 썼는데, 이제는 그렇게 쓰고 싶어 하던 안경을 아무렇지 않게 쓰게 되었으니 소원성취를 하였다고 썼다. 글 쓸 자리를 찾아
돌아다니느라 시간이 허비되어, 결국 글을 쓰기 시작한 시간은 12시 30분, 2시 마감까지는 1시간 30분 밖에 남지 않았으니 밀도 있는 글을 쓸 수 있다는
희망은 버렸다. 글 한편 써서 내는 것으로 갈무리하기로 하고 원고지에 옮겨 적는데. 원고지를 써본 적이 언제였나, 헛갈려서 허둥대느라 손이 다 떨렸다.
“와! 아름다운 풍경이다!”
“근데, 이 사람들은 어떻게 알고 오는 거지?”
젊은 여자 둘이 지나가며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나도 궁금했다. 어디서 소식을 알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걸까.
글을 서둘러 제출하고 보니 아직 줄 서 있는 사람들이 서서 한 손으로 노트 등을 받치고 원고지에 글을 쓰거나 바닥에서 글을 쓰는 사람이 보이기도 했다.
당일 심사하여 시상식은 5시에 열린다고 했다. 그냥 집으로 갈까 생각하다가 산책 삼아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곳곳에 극장들 이름이 보였다.
한 건물에 ‘물빛극장도 있고 ‘풀빛극장도 있었다. 아이보리색 건물의 ‘정화 예술 대학도 보이고, 오른쪽으로 걸어가니 방송통신대 건물도 보였다. 문득 , 김애란 작가의 강연이 오늘 있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방송통신대 건물 '열린관'으로 들어갔다. 이미 자리가 꽉 차서 서서 들을 수 있는 공간도 없다는 안내원의 말이 있었다.
몇 년 전 ‘바깥은 여름’이라는 작가의 책을 인상 깊게 읽어서 들어 보고 싶은 강연이었는데, 아쉬웠다. 사람들은 어찌 그리 다 재빠른 걸까.
돌아 나오다 보니 ‘백일장 실내 글쓰기공간'이라는 안내문들이 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미리 와서 여기저기 둘러보았다면 글쓰기 좋은 자리를 발견했을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후기들을 읽어보니 멀리 제주에서 전날 올라와서 근처에 숙소를 잡아 자고, 글제를 받아서
숙소에서 썼다는 사람도 보이고, 강원도에서 새벽에 올라와서 9시에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였다는 후기도 보였다.
시상식 사회자는 올해가 역대급으로 참가 인원이 많았다고 말했다. 재즈 공연과 히든 싱어에서 임창정 모창으로 유명 해졌다는 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시상식이 이어졌다.
나는 열심히 박수를 쳤다. 3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했나 생각해 보았다. 나는 무엇을 하였나, 어떤 삶을 살았나. 그러지 말걸, 그렇게 다 쏟아붓지 말걸,
그러지 말걸, 그렇게 아무것도 안 하지 말걸. 골목 어귀에서 연거푸 흙바닥에 발길질을 해대는 아이처럼 괜히 성이 났다.
심사위원의 말 중에 “문학의 길이란 길고 지난한 것이다. 부디 계속 정진해서 한 분야의 일가를 이루길 바란다”는 내용이 있었다. 시도를 해보지 않아서 실패하지 못했던 것이다. 스티븐 킹은 13세부터 각종 신문이나 잡지에 투고를 하였는데 계속된 거절 편지를 받았다. 거절 편지를 버리지 않고 벽에 못으로 꽂아 놓았는데 그 후로도 계속 거절 편지를 받아서 같은 못에 계속 꽂아 나중에는 못이 휘청거리며 빠질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실패하기 위하여 이곳에 온 것이었다. 이미 일가를 이루고도 남을 나이지만, 다시 시작된 나의 글쓰기 나이는 이제 5년쯤 되었으니 5살이다.
충분히 실패해도 될 나이다. 애를 써도 완벽한 동그라미는 그리지 못하고, 그럴듯한 것은 이루지 못하고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나선형의 계단을 오를 것이다.
글쓰기란 혼자 하는 것이다. 혼자 깊고 고요한 우물 속으로 잠수해 들어가는 것과 같다.
몸은 여기에 있어도 마음은 끝없는 곳을 돌아다니다가, 어미새처럼 무언가 한 가지를 물고 오는 것이다.
스티븐 킹은‘유혹하는 글쓰기’에서 ‘소설은 발굴되는 것‘이라고 했다. 고대의 유물처럼 깊게 묻혀 있던 이야기가 어느 날 우연과 우연이 만나서 발굴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야기가 발굴되는 작업은 분명 혼자만의 작업이다. 작가는 ‘삶이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하였다. ‘초고는 문을 닫고 써야 하지만 수정은 문을 열고 하라 ‘고 말한다. 글은 사람의 이야기며 역사이다. 혼자 책을 읽고 글을 쓰던 내가, 큰 용기를 내어 동네 작은 서점에서 단기로 열리는 글쓰기 강좌에 나갔다.
5주 동안 하던 강좌가 끝나고 5명이 모여 글쓰기 모임을 2년 가까이하다가, 출산과 이사 등의 사정으로 모임이 끝나게 되었다. 그동안의 경험으로 용기를 얻어 도서관에서
하는 미술강좌도 신청하고 정말 신나게 들었다. 강좌가 끝나고 글쓰기 동아리에 또 용감하게 참여해서 그림과 글을 함께 나누면서 내 앎의 지평을 넓히며 살아가고 있다.
20년 동안 집에서 밥만 하던 내게도 안 올 것 같은 날들이 왔다. 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도 듣고, 독서 모임도 하고 작은 발걸음 하나로 시작해서 점점 더 큰 나선을 그려가면서
살고 있다.
‘군상‘시리즈는 화가 이 응노가 말년에 10년 가까이 그린 것이다. 먼 타국에서 광주민주화운동 소식을 듣고 그리게 되었다.
작고 단순한 개인들이 모여서 거대한 물결과 흐름을 만드는 것으로 보인다. 동백림 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프랑스로 건너가 활동하다, 페르 라세즈 묘지에 묻힌
이응로의 그림 ‘군상’ 속의 사람들은 아주 작다.
역사의 소용돌이 휩쓸릴 수 박에 없는 나약한 사람들을 표현한 것일까. 그러니 함께 모이자고 말하는 것일까. 그림을 들여다보니 모두 각자의 춤을 추고 있다.
멀다면 먼 채로, 가까우면 가깝다. 새끼줄처럼 엮여서 살아가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대한 흐름을 만든다. 오늘 내가 내딛는 한 걸음도 그 물줄기의 작은 부분이 될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