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달력의 숫자마저도 11월을 닮았다. 한껏 물든 나무는 잎사귀를 떨군다.
횡단보도에 서서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붕어빵 노점의 비닐 휘장이 걷혀 있었다.
붕어빵을 종이봉투에 담아 주며 손님에게 인사하는 붕어빵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어제저녁 붕어빵 노점을 지나다가 웬 남자가 할머니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습을 보았다.
순간, 술 취한 사람이 행패라도 부리는 건가 싶어 걸음을 멈췄다.
“엄마! 왜 또 나와서 이러고 있냐고! 왜 그래 진짜! “
남자가 말을 쏟아내고 있었고 붕어빵 할머니는 말없이 안쪽에 앉아 있었다.
“엄마! 엄마 때문에 자식 셋이 다 죽을 지경이야! 혈관도 다 막히고 나도 머리 아파서 죽을 지경이야! “
남자의 목소리는 탁하고 낫게 갈라지고 있었다.
“형은, 그 인간은 전화도 안 받아! 왜 또 나와서 이러고 있냐고!” 남자는 쉰 목소리 끝에 애닮은 울음을 매달고 있었다.
언뜻 보아도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는 할머니의 막내아들쯤 되려나 싶었다. 양은 주전자를 들썩이며 남자는 한참을 쉰 소리를 내었고 백열등 아래 앉아 있던 할머니는 말이 없었다. 누구에게든, 어느 때라도, 삼키지도 뱉지도 못하는 말들을 입에 물고 있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애절한 소리를 내지르며 살아 내는 날이 있다. 이동네로 이사 온 지 17년째인데, 그때도 붕어빵 할머니는 건널목 앞 그 자리에서 붕어빵과 어묵을 팔고 있었다. 그녀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했고 풍채가 좋았다. 마트에서 장을 봐서 지나가면 “언니야! 맛있는 거 많이 샀나? 붕어빵도 좀 사가라!” 하거나, 지나가는 학생들에게 “여 붕어빵 맛있다, 사 먹어라!”하며 호객 행위를 했다. 길 옆에서 트럭에 양말과 옷가지를 놓고 파는 아줌마와 천막 안쪽에서 점심을 먹는 모습도 자주 보았다.
여름에는 찰 옥수수를 팔고 날이 서늘해지면 어묵과 붕어빵을 팔던 할머니가 한동안 자취를 감춘 것은 4년쯤 전이었다. 단골이었던 아이들과 나는 한동안 붕어빵을 사 먹을 데가 없어서 많이 아쉬웠다. 아마도 연세가 많으시니 힘들어서 그만두었나 생각했다.
그 자리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천막도 다 걷히고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다시 그 자리에 할머니가 나타나 붕어빵을 팔기 시작한 것이 재작년쯤이었다. 다시 나타난 그녀의 몸은 딱 반으로 줄어 있었다.
붕어빵을 사며 “어디가 많이 아프셨나 봐요! 살이 너무 많이 빠지셨네요” 내가 말했다. 할머니는 “18킬로가 빠졌다. 18키로면 고기가 몇 근이여”라고 말했다.
“식사를 잘하셔야죠 “ 내가 말했다. 속 마음으로는 그 몸으로 몸조리를 해야지 붕어빵을 팔러 나왔느냐고 말하고 싶었으나, 남의 사정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말이라도 고맙네”하며 그녀는 붕어빵을 하나 더 넣어 주었다. 얼마 전에도 며칠 할머니가 보이지 않았었다.
노쇠한 몸을 이끌고 그녀는 거기 있어야만 하는 까닭이 있을 것이다. 아들이 울음이 섞인 쉰소리를 내는 사연도, 컴컴한 그녀가 말을 머금는 것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
노란 은행잎이 뒤덮는 길가, 그녀의 천막에는 60촉의 전구가 불을 밝히고 뿌연 김이 서렸다.
살갗을 파고드는 예리한 그림을 그렸던 에곤 쉴레의 그림 ‘네 그루의 나무’는 황량 하지만 따뜻한 기운이 감돈다. 1918년 스페인 독감으로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그가 좀 더 살았다면 그의 그림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송곳 같은 그림도 어느 정도는 뭉근 해 졌을지 것이다. 결혼 후 곧바로 전쟁에 동원된 그는 그해 3월부터 9월 말까지 상세한 일기를 남겼다. 일기 마지막 페이지에 있던 6개의 작은 풍경 스케치는 ‘네 그루의 나무들’ 그림의 모티브가 되었다. 그림은 오스트리아 빈 남부의
알프스의 작은 언덕과 일치한다. 나는 고향 마을의 언덕과 그 비탈길에 서있던 나무들 모습들과 흡사함을 느낀다. 11월은 떨구는 계절이다.
도토리도 떨어지고, 알암이 가득 차 툭 터지는 밤도, 빨갛게 익은 대추도, 은행도, 떨어진다. 떨구는 것들은 품었던 것이며 열매이다. 11월이면 텃밭에서 배추와 무를 뽑아 김장을 한 후, 밭을 갈고 거름을 내어 이랑을 만들고 고랑을 낸다. 밭에 두엄을 내고 쇠스랑으로 흙을 고르고 마늘을 심는다.
마늘은 그대로 씨가 된다. 여름에 캐낸 마늘 중 제일 크고 실한 것들은 장에 내다 팔고, 중간치 것들은 집에서 먹고 제일 작은 조무레기들을 망에 넣어 두었다가 쪽을 내어 씨마늘로 쓴다. 마늘을 심고 그 위에 왕겨를 두툼하게 뿌려 덮어 놓으면 겨우내 얼지 않고 땅속에서 여물어 갈 것이다. 추위가 물러가는 봄이 오면 따사로운 기운을 타고 마늘 푸른 싹이 삐죽 솟을 것이다. 그리고 한여름 뙤약볕 속에 큰 살림 밑천이 되는 마늘을 캔다.
죽음의 순간에서도 사랑을 느낄 수 있고 아름다움을 찬미할 수 있다고, ‘죽음의 수용소에서’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수용소에서 일할 때도 우리들은 종종 옆에서 일하는 동료의 눈을 돌려 바바리아 숲의 키 큰 나무 사이로 햇볕이 비치는 아름다운 풍경을 (뒤러의 유명한 수채화처럼)
바라보게 했다. 그 숲은 우리가 대규모 비밀 군수품 제조 공장을 짓는데 동원되었던 그 숲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었다. 죽도록 피곤한 몸으로 막사 바닥에 앉아서 수프 그릇을 들고 있는 우리에게 동료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는 점호장으로 가서 해가 지는 멋진 풍경을 보라는 것이었다. 밖에 나가서 우리는 서쪽에 빛나고 있는 구름과, 짙은 청색에서
핏빛으로 끊임없이 색과 모양이 변하는 구름으로 살아 숨 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진흙 바닥에 패인 웅덩이에 비친 하늘의 빛나는 풍경이 잿빛으로 지어진 우리의 초라한 임시막사와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감동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니!” ‘
빅터 프랭클과 동료들이 보았던 숲은 에곤 쉴레가 그린 ‘네 그루의 나무들‘이 있던 숲과 닮았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무엇을 볼 것인지는 선택할 수 없으나 어떻게 느낄지는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이란, 살고자 하는 방향으로 돌아서며 품는 것이다.
11월의 나무는 애잔하다.
감싸고 있던 것들을 다 벗겨 내며 스산하게, 지는 해를 가지 끝에 걸고 있다.
봄에 씨앗을 뿌려 뜨거운 여름을 견디고 가을에 거둬들일 수도 있고, 가을에 땅에 심어 추위를 지나고 여름에 수확하기도 한다.
여위듯 깊어 가는 이 계절에 우리가 떨구는 것들은 품었던 열매들이며 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