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는 사람

by 그방에 사는 여자

오래전, 아이들과 뮤지컬을 보러 갔었다.

웨민쥔

좀 일찍 도착해서 포스터 앞에서 사진 찍고 구경도 하는데, 줄이 길게 서있는 게 보였다.

거의가 20,30대 여자들이었다. 우리가 보기로 한 공연인가 살펴보니 같은 날 다른 무대에서 유명 가수가 뮤지컬 공연을 하고 있었다.

무슨 팬미팅인가 싶게 줄이 정말 끝도 없이 길었다. 그 뮤지컬 제목은 ‘웃는 남자‘ 였다.

우리가 본 뮤지컬도 좌석이 꽉 찼는데, 저렇게 줄 서 있으면 사람이 얼마나 많은 건가 싶었다.

그때만 해도 책을 꽤 읽는 중딩이었던 큰 딸이

'웃는 남자' 책을 사달라고 했다. 내가 읽을 책이었다면 아마 도서관을 이용했을 것이다. 딸이 읽겠다고 하니 동네에 있는 제법 큰 서점에 가서 책을 사주었다. 큰딸은 1권 2권으로 나누어진 책을 한두 번 펼쳐 보더니 다음에 읽겠다고 책꽂이에 고이 꽂아만 두었다.

딸이 안 읽으니 나라도 읽겠다며 꺼내 펼쳤던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책을 찾아보니 1권 중반까지 밑줄을 치고 읽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이런 좋은 작품을 이렇게 홀대하였다니, 찬찬히 읽어 보기로 하였다.


1869년 빅토르 위고는 ‘웃는 남자‘를 발표하고, ‘이 이상의 위대한 작품을 쓰지 못했다 ‘고 말했다.

이야기는 실제로 17,18세기에 성행했던 ‘콤프라치코스’라는 어린이 매매단의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

웃는 남자의 주인공 그윈플랜은 납치되어 입가가 찢어져 마치 웃는 것처럼 보이는 성형 수술을 받고 광대로 살아가게 된다.

‘아이는 까마득히 모른다. 유황으로 지지고 칼로 절개했다는 사실을 아이는 기억해 내지 못했다.‘

주인공 그윈플랜이 자신을 납치 한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추위와 굶주림 속에 헤매는 장면이 있다.

‘무심코 움켜 잡은 풀 한 포기가 그를 구했다. 사람들 앞에서 절규하지 않았던 것처럼, 심연 앞에 서도 비명 지르지 않았다.

스스로를 다잡고 묵묵히 올라갔다.‘ 열 살 남 짓었을 아이는 고통 앞에서 소리 지르지 않았다. 그저 살고자 체념하였다. 그읜플랜은 눈먼 소녀 데아와 떠돌이 철학자 우르르수스와, 늑대 호모와 함께 떠돌며 광대로 살아간다.

‘ 사람들은 나를 웃는 괴물이라 부르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웃은 적이 없다. 내 웃음은 칼로 새겨진 것이니까 ‘라고 그는 말한다.

’ 데아 ‘는 그를 순수하게 사랑한다.


웨민쥔은 <웃음 시리즈>을 통하여 현실을 마음껏 비웃고, 조롱하고 싶은 듯하다. 그림 속 인물들은 작가 자신과 매우 닮았다.

‘내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바보 같다. 그들은 웃고 있지만 그 웃음 속에는 강요된 부자유와 허무가 숨어 있다.

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해하는 사람들을을 표현한다. 이들은 내 자신의 초상이자

친구의 모습이며 동시에 이 시대의 슬픈 자화상이다’라고 그는 말한다. 작품 속 인물들은 과장된 제스처와 입모양으로 과격하게

크게 웃고 있다. 현실이 혼란스러울수록 더 크게, 강하게 웃게 된다. 대분분의 작가들이 다른 사람을 많이 그리는데 반하여 웨민쥔은

자신을 주로 그렸다. 그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었거나 아니면 대놓고 조롱할 만큼의 결핍을 느꼈을 수도 있다.

한때, 나는 인상이 몹시 쎄 보인다는 소리를 듣고는 했다. 또한, 여리고 숫기가 없어 얼굴이 자주 빨개지던 나는, 그렇게 순진해서

세상을 어찌 살겠느냐는 말도 자주 들었다. 인상이 쎄 보인다는 소리를 들을 때면 내가 얼마나 무른 사람인데 저런 말을 하나 싶어

억울한 감정이 올라왔다. 세상 물정 모르고 순진하다는 소리를 들으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도 알 거 다 알고 줏대도 있다고 어필하려고

발끈했다.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 곱지 않으니 사람들이 하는 말도 고깝게 들렸다. 다행히도, 이제 나이를 먹은 나는 스스로를 관망한다. 그럴 땐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이고 저럴 땐 내가 저런 사람으로 보이는 걸 바라본다. 거울을 볼 때면 억지로 입꼬리를 확 올리고 어색하게라도 자주 웃는다. 얼굴은 주름져 하회탈이 되지만 나를 향해 웃는다.

어느 순간 나는 착각을 한다. 웃는다고, 그러면 진짜 웃는 사람이 된다.


김완의 ‘죽은 자의 집 청소‘를 읽는다.‘ 주로 홀로 숨을 거 둔 사람들의 마지막 집정리를 하는 장면들이 이어진다. 작가는 고독사라는 말보다

고립사라는 단어가 더 적합하다고 이야기한다. 모든 죽음이 애틋하지만 죽음의 순간에 말끔하게 분리수거를 해놓은 죽음이 기억에 남는다.

서른쯤 된 여자는 집안을 빈틈없이 밀봉하고 캠핑용 간이 화로를 놓고 직화탄 여러 개를 얹어 불을 피웠다. 작가는 화로 주변이 너무나 깔끔하다고

생각한다. 토치램프나 라이터, 하다못해 제과점 성냥 초차도 없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의문은 현관문 왼쪽에 놓인 가정용 분리 수거함을 정리하며 풀렸다. 재활용품과 쓰레기를 정리하며 의문이 풀렸다. 재활용품과 쓰레기를

구분해 두기 위해 네 칸으로 나누어진 수거함에 사라진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불을 피우는데 쓴 금속 토치와 부탄가스 캔은 철 종류를 모으는

칸에, 화로의 포장지와 택배 상자는 납작하게 접힌 채 종이 칸에, 또 부탄가스 캔의 빨간 노즐 마개는 플라스틱 칸에 착실하게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자살 직전에 분리수거를 한 것이다.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방 안에서 분리수거를 하고 이부자리로 걸어가 눕는 그녀를 상상해 보았다.

고적한 죽음이었다. 서른쯤 되었을 그녀는 건물의 계단을 청소하는 사람에게 친절하고, 명절이면 식용유 세트나 양말등을 선물하기도 했다.

그녀는, 타인에겐 친절하고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사람이었을까. 그녀가 세상에 조금은 분노하고 스스로에게 몹시 관대하였다면 어땠을까. 살아서 마침내 늙어 간다면, 한 자락의

행복도 가끔은 찾아왔을까.


‘웃는 남자‘의 그윈플랜은 말한다. ’ 나는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 하지만 나의 웃음은 너희의 조롱을 막기 위한 방패일 뿐이다.

나를 만든 것은 너희다. 내가 고통을 겪는 동안 너희는 눈을 감았다.’

외로움이란, 참으로 무참한 것이다. 한 사람의 외로움 따위 세상은 기억하지 않는다.

누구도 무엇도 묻지 않는 시절을 건넌 지금도 나에겐 보풀 같은 외로움들이 붙어 있다.

그것을, 떼어내고, 잘라 버리고, 때로는 그냥 데리고 살아간다. 세상을 향해 아무렇지 않은 척 웃고, 나를 향해 입꼬리를 올리고 더 활짝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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