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B급 가족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방에 사는 여자 Aug 21. 2024

발리 여행, 2일 차

너무 조용한 고독

전날에는 여기저기 구경 다니느라 바빴으므로 1일 자유 일정인 오늘은 하루종일 수영을 하며 호텔에 머무르기로 했다.

 아침 8시쯤 일어나  둘째 딸은 세수만 하고 먼저 아빠랑 아침을 먹으러 내려가고, 나는 화장을 하는 큰딸을 기다리며 캐리어에서 수영복과 비치 타월을 꺼내놓고, 큰딸이 인터넷으로 구입한 스노콜링 장비도 챙겼다. 9년 전쯤에 엄마들이랑 아이들끼리 세 가족이 여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바닷가에서 스노클링을 했었는데 그때가 즐거운 기억으로 남았었는지 가끔씩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이번 여행에서도 필요할지  몰라서 오리발은 부피도 커서 현지에서 빌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빼고, 고글과 스노클링마스크를 구입했다고 하였다. 일정상 해변에서는 발만 담가 볼 수 있었으므로, 수영장에서 하루종일 수영하며 잘 갖고 놀았다.


아침식사는 빵과 샐러드, 수박과 생선 튀김 애플망고. 그리고 간장으로 볶은 듯 짬 조름 한 볶음밥과 볶음쌀국수등을 먹었다. 둘째 딸이 작고 동그란 떡 같은 음식을 먹어 보라고 건네주었다. 먹어 보니 차가운 꿀떡 맛이 나는 게  아이스 찰떡같았다. 뻥튀기랑  비슷한 과자는 좀 짭조름하고 고소한 게 새우칩 맛이 났고, 쌀은 술밥처럼 되지 않고 찰기가 있어서 먹기에 부담이 없었다.



 남편과 둘째가 야외 쪽에 자리를 잡아서 자리가 더 한적해서 좋았다. 호텔 직원이 다가와서 차는 무엇을 마시겠냐고 물어서 나는 따뜻한 홍차를 남편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한국에만  있는 메뉴인 줄 알았는데 발리에도 있어서 신기했다. 옆  테이블에는 돌 때쯤 되어 보이는  귀여운 남자 아기를 동반한 젊은 백인 가족이 있었다. 그 아기는 옆 테이블로 아장아장 걸어가서 유모차에 앉아 있는 더 작은 아기에게 관심을 보이며 웃고 있었다. 그 유모차 아기 가족들은 아랍계로 보였다.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한 공간에 있고 다양한 언어들이 들리는 곳에서 아침을 먹고 있자니 참으로 자연스러워서 낯설었다. 한참 전에 주문한 차는 거의 30분이 지나서 내왔다. 뭔가 대단한 것도 아니고 따뜻한 물과 티백 하나를 준비하는데 그토록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아마도 빨리 움직여야 할 까닭이 없어서겠지.



아침 식사를 끝내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딸들은 하루 종일 거의 물밖으로 안 나오고 수영을 했다. 수영을 할 줄 모르는 나는 물속에 몸을 담가 더위를 식히고 물 위에 떠있는 쿠션 위에 누워 물 위에 두둥실 떠 있었다. 발리 날씨가 엄청 더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한국 보다 더 시원했다. 우리나라도 더운데 왜 더 더운 나라로 가느냐고 주변 지인들이 하는 말에, 밥 안 하면 안 덥다고 기분 좋게 응수하고 왔었는데, 여행하기 좋은 날씨라 다행이었다. 옆에는 몸집이 제법 큰 백인 여자가  물 위 쿠션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녀의 수영복은 몸을 최소한도만 가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괘념치 않아 보이는 모습이었다.

편안하고 자유로와 보였다. 이곳에서 긴팔 수영복을 입은 사람은 나 한 사람이었다. 그 수영복은  둘째가 한번 입고 안 입어서 아까워서 내가 입었다. 몇 년 전 친구들과 물놀이를 간다고 해서 꿀리지 말라고 제법 비싸게 주고 샀었다. 한번 입고는 그 뒤로는  일이 만 원대의 귀여운 원피스 수영복을 인터넷 쇼핑몰에서 구입해서 입었다.



수영장에는 물안 있는 사람보다 썬 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사람이 더 많았다. 나도 썬베드에 비스듬히 누워 책을 읽었다. 내가 읽고 있는 책은 보후밀 흐라발이라는 체코 출신의 작가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라는 책이다. 이 책은 작가가 가장 사랑하는 책이라고 한다. 이 책을 쓰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는 인터뷰를 했다는데 '드로잉을 완성하는데 5분이 걸렸지만, 이에 다다르기까지 60년이 걸렸다'는 르느와르의 말이 떠올랐다. 오른쪽에는 호주인일 것 같은 부부가 대화를 하며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왼쪽 자리에는 영국인 일 것 같은 잘생긴 청년이 책을 읽다가, 딸들이 수영을 하며 다가와서 물을 튕겼는데 씩 웃는 게 착해 보였다.


이런 곳에서 한동안 살 수 있다면 한없이 착해지고 한적해질 것 같았다. 책을 한 수레 끌고 와서 읽고 먹고 하다 보면 나와 더욱 가까워질 것 같다. 멍하니 하늘을 보며 누워 있자니 사람은  아무리 멀리 떠나와도 자기 몸 밖으로는 단 한 발자국도 내딛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가본 곳 중의 가장 먼 곳으로 떠나 왔어도  나는 내 몸 안에 갇힌 존재였다. 그동안  읽은 책들을 나는 거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들을 다 기억할 수 있다면 나는 좀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을까? 내가 읽은 책들로 지금의 내가 되었다면 그것 또한  맹랑한 일이다. 잊었는데, 내 몸 어딘가에 기억의 뒤주가 있어서 소복하게 쌓여 있을지도 모르겠다.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의 주인공 한탸처럼, 맑은 샘물과 고인 물이 가득한 항아리여서 조금만 몸을 기울여도 근사한 생각의 물줄기가 흘러나와야 하는데. 한때 내 피 속에는 글자들이 둥둥 떠다닐 것만 같았데, 지금의 나는 그냥 사는 사람 일뿐이다. 6시 무렵 날이 어둑해졌다. 한국과는 시차가 1시간 정도인데 날은 더 빨리 저물었다.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이런 시간이

되면, 좀 더 선명해지고 입체적인 시간이 된다.

하루 중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순간을 너무도 사랑하는

늙은 폐지 압축공 한 탸처럼, 나도 해 질 녘을 너무도 사랑한다. 날마다 해 질 녘이면 아름다움을 향해 가는 문이 열리고, 그 시간은 짧다. 발리의 수영장에서는 익숙한 음악들이 많이 나오고 있었고, 팝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듣고 싶은 음악을 신청하기도 하였다.


저녁에는 햇반과 김, 김치, 라면, 참치로 저녁을 먹었다. 방충망이 없는 테라스 문을 열어 놨는데도 모기가 없었다. 딸들도 남편도 점심도 거르고 하루종일 수영을 했던 터라 맛있게 먹었다. 행복이라는 불행을 어진 한탸처럼, 내가 행복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나는 몹시 불편해졌다. 기실  다만 아주 조용한 고독 속에 푹 잠겨 있고 만 싶었다.



서걱대는 식구들 틈에서 사소한 것들을 챙기며 숙제처럼 준비하고 과업처럼 하고 있는 여행이

고단 하긴 했다. 아이들이 어렸던 6년 전의 여행에서는, 버스에서  남편과 내가 떨어져 각자 앉아서 가도, 내가 옆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남편은 뒤로 가라고 손짓했다. 다른 부부들은 모두 손을 꼭 잡고 다녔다. 짐 싸느라 나 혼자 뒤늦게 아침을 먹어도 괜찮았다. 아이들이 즐거우면 됐으니까. 이제는 아이들이 컸다.


각방을 써온 남편과  한방을 쓰는 것도 어색하고. 다 큰 딸들과 함께 자며 온갖  불만을 듣는 것도 피곤했다. 첫날은 아이들과 자고 둘째 날은 남편의 방에서 잤다. 잠자리 유목민이었다.

그래서 나는 불편했다. 그래도 여행은 즐거웠다.







매거진의 이전글 초록색 책장을 버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