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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Oct 02. 2024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

야외 스케치를 나갔다.

고등학교 미술 수업시간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수십 년만 이었다. 지난 수업시간에 선생님께서 다음 수업은 야외 스케치를 나가자고 하셨다.

​나는 실제의 풍경을 보고 그림을 그릴 능력이 안된다. 다른 이가 그린 그림을 보고 따라 그리는 수준이다. 다음 수업은 나가지 말까 하고 생각하였다. 다음 월요일 오전, 그림 수업은 까맣게 잊고

뒷 베란다에서 양말을 빨고 있는데 카톡이 울렸다. 오늘 야외 스케치 수업에서 만나자는 선생님의 체 카톡이었다. 나갈까? 말까? 하는 마음이 생겼다, 말았다, 했다. 점심 설거지를 미루어 두고 집을 나섰다.



그림을 그려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것은 삼 년 전쯤이다. 여기저기  알아보니 수업료가 비싸서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어느 날 걷기 운동을 하는데  주민센터에서 모집하는 프로그램이 적힌 현수막이 보였다. 저렴한 가격에  이것저것 꽤나 매력적인 프로그램들이 있었다. 그중에 '어반 스케치'라는 프로그램명이 눈에 들어왔다.

스케치는 알겠는데 어반은 무엇일까? 네이버로 찾아보았다. 어반은 '도시의,  도회지의'를 뜻 하였다. 어반 스케치는 ' 자신의 일상에서 마주 하는 풍경들을 간단한 선과 채색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가리킨다.'라고 쓰여 있었다. 그때는 이미 모집기간이 지났었다. 3개월 후에 신청을 하였다.  


처음 수업을 가는 날,  큰 맘을 먹었다.

나이 들어가며, 무언가를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이 더라도 큰 맘을 먹어야 한다. 마음은 크게 먹고,  태도는 가볍게 하였다.

선만 가득 긋고, 곡선만  그리는데 마음이 고요해졌다. 연필에서 나는 사각 거리는 소리가 좋고, 종이 냄새가 좋았다. 재미가 있고,  즐거워졌다.  그거면 되었다.



중국식 정원인 월화원에 도착하니 선생님과 회원 몇 분이 먼저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다.

실내에서 수업할 때 보다 편안한 느낌이었다.

걸어오느라 조금 더웠는데 그늘에 앉으니 시원했다. 가느다란 대나무들이 바람에 함께 흔들거렸다.  집에서 그린 그림 한 점을 선생님께 보여드렸다.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한 귀퉁이에 있었다. 작은 그림 한 점을 그리면서도 색을 내는 것이 어려웠다. 물감으로 보았을 때의 색과, 물을 섞어서 색칠했을 때의 색이 달랐다. 색과 색을 섞어서 다른 색을 내는 것이 어려웠다. 역시나,  자꾸자꾸 섞어 보고, 그려 보고, 칠해 봐야지, 다른 수는 없다고 하셨다. 빠르게 스케치해서 그리는 것이 '어반 스케치'라고 하지만, 그것은 솜씨가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공간을 아끼는 마음을 되찾고 싶었다. 나를 둘러싼, 이곳의 삶이 나를 얼마나 행복하게 하는지 알아차리고 싶었다. 남루한 삶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어 놓았던 나를 일으켜 세워, 돌보고자 하였다. 가다듬고, 정돈하고, 애정을 주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뼘만큼의 공간이라도  어루만지고 싶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이었다.



맞춤한 자리가 있어 돗자리를 펴고 앉았다.

앉아서 한참을 바라보니, 연못과 나무와 아치형의 다리와, 기와가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특히나 연못에 비친 물그림자가 아름다웠다.

선생님께서는 그리고자 하는 장소에 여러 번 오면, 다가오는 풍경이 있다고 하셨다. 주변의 다른 것들은 사라지고 도드라지게 다가온다고 하였다. 사랑함에는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한다.


월화원에는 다른 뜻이 있겠지만, 나는 달빛이 꽃처럼 피어나는 정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어둠이 내린 저녁에 이곳에 오면, 조명에 비친 나무와 연못이 한결 아름답다. 그 모습은 은은한 달빛에 부드럽게 피어나는 달맞이꽃과  닮아 있었다. 내가 앉은 뒤에는 어르신 두 분이 스텝을 연습하고 계셨다. 한분이 숙달된 조교로 다른 분에게 가르쳐 주고 계셨다.

까르르 , 웃음소리가 퍼졌다. 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노트 한 바닥만큼 작은 스케치북 속에 깊고 고요한 세계가 있었다.


 나는 또 큰 마음을 먹을 것이다. 미흡한 열매들을 내어 놓고 건사할 것이다. 달빛이 꽃처럼 피어나는 정원은 도처에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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