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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Jun 11. 2024

유월의 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은 차가움이었다. 맨발 걷기를 시작하며 흙바닥이 시원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렸을 벼를 다 빈 논에 들어가서 볏단을 나르거나, 밭에 서 곡괭이로 밭 고르기를 할 때, 해변가 모래사장을 걷거나, 갯벌에서 조개 잡이를

할 때 느꼈을 촉감이 새삼스레 다가왔다.



맨 발 걷기의 열풍이 불어 닥쳐 여기저기서 온 국민이 맨발로 걷기 시작하던 지난해에는, 좀 낯설기도 하였고 걷는 사람이 많기도 하여서

망설이다 지나쳤다.

점점 날이 더워지면서 늘 걷기를 하는, 그늘 없는 천변길이 뜨거워졌다. 이맘때쯤부터는 저녁에 나와서 카페 둘레길을 걸었었다. 걷기 만을 위한

걷기 구력 오 년 차에 올해부터는 맨발 걷기를 시작해 보자 마음먹었다.



유월이 되자마자 동네 공원에 조성해 놓은 맨발 산책로를 거의 매일 걸었다. 때에 따라 오전일 때도 오후나 저녁일 때도 있었다. 저녁에는 낮은

조명이 비춰서 걷기에 도움이 되었다. 맨발 걷기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 걷기를 할 때는 푹신하고 가벼운 운동화가 필수였으나, 맨발 걷기를

하기 위해서는 걸을 수 있는 발과 다리만 있으면 되었다.



걷기가 빠르게, 경쾌하게가 매력 포인트라면, 맨발 걷기는 느리게 천천히 머무르듯이가 주어이다. 천천히 걷거나 지신 밟기 하듯, 다듬잇돌 밟듯이

자근자근 밟아 준다. 멈춰 서서 오랫동안 밟아 준다.

공원 맨발 걷기 둘레길은 지난해 보다 더 여러 갈래의 길들이 생겨났고, 올해는 커다란 나무틀을 만들어 놓고 황토 흙을 잔뜩 부려 놓아서

황토 흙을 맨발로 밟을 수 있는 호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 황토 흙을 밟으면 미끄덩한 느낌과 발가락 사이로 올챙이처럼 삐죽 나오는 진흙이

귀엽다. 네모 반듯한 황토흙판을 걷는 동안에는 머무름이 있다. 두 발을 굳건하게 디디고 서 있으면 나도 깊은 뿌리를 내리고 나무가 될 것만 같다.




오늘은 오전에 한나절 비가 내린 뒤끝이라 그런지 바람이 상큼했고 걷는 사람이 평소보다 많았다.

물기를 담뿍 머금은 흙길은 쫀득쫀득했다.

어디선가 구성진 트로트 가락이 들린다 했더니, 산 위에 있는 정자에서 한껏 멋을 낸 어르신들이 트럼펫으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정자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 들이나 벤치에 앉아 계신 어르신들이 신이 나서 박수를 치며 연주를 듣고 있었다. 덕분에 걷는 내내 귀가 즐거웠다. 역시 사람은

즐거움을 따르는 존재이다.



공원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는데, 산 위에 있는 정자에는 할머니들이 모여서 고구마나 강냉이를 드시면서 담소도 나누시고 음악도 듣고 더러는

주무시기도 하신다. 산 아래 있는 정자에는 할아버지들이 주로 모여서 장기나 바둑을 두신다. 그리고 대부분은 바둑이나 장기 두시는 모습을 바라

보시며 훈수를 두신다. 이 또한 이곳의 질서이다.



황토 흙을 자박자박 밟다 보면 옆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잘 들린다. 골밀도 수치가 어떻다 하고, 뭐를 어떻게 먹으면 몸에 좋고, 맨발 걷기를

하고 잠을 잘 잔다거나, 보름 전에 딸이 아기를 낳았다거나, 아들이 고기를 좋아해서 고기 반찬 해주느라 살을 못 뺀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삶의 이야기들이 아무렇게나 침범하여 들려온다. 나와 별반 다를 것이 없거나 다가 올 이야기들이다.



맨발 걷기란, 늘 뱅글뱅글 돌거나 제자리걸음인 생과 닮아 있다. 지나온 길도 없고 지나갈 길도 없이 모두 제쳐 두고 없음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 오늘로 덮고 내 걸음 위에 네 걸음으로 덮는다. 첫날은 맨발 걷기를 끝내고 수건을 가져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수돗가에서 발을 닦고 젖은 발로 양말을 신었다. 다음날부터는 수건을 꼭 준비해서 갔다.

발을 닦고 운동화를 신는 순간 늘 신던 낡은 나의 운동화가 정말 푹신하고 조금은 높게 느껴졌다. 한 시간 남직 땅과 직접 닿았을 뿐인데 이토록 푹신하다니, 느낌이 낯설었다. 낡고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운동화가 더없이 귀하고 소중하게 느껴졌다.

낯섦을 경험해 보며 이 야트막한 산자락에서 여름을 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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