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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방에 사는 여자
Apr 11. 2024
열어 놓은 주방 베란다로 훈훈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아침, 감자 한 알을 말갛게 껍질을 벗기고, 호박을 반달 모양으로 툭툭 썰고 두부 반모를 납작하게 썰어 넣어 된장찌개를 끓였다.
맞춤하게 된장이 베어든 감자는 폭신하면서도
구수하다. 결혼을 하고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밥을 했다. 딱, 한 글자로는 담아내지 못할 많은 것들을 의미하는 밥을 하는 일은, 반복이면서도 매일 또 새로운 노동의 시간이다.
최 진영의 소설"해가 지는 쪽으로"에서는 이런 구절이 있다."평생을 이런 식으로 살아야 할지도 모르고, 이번이 마지막 식사가 될지도 모르잖아, 그럼 감자 한 알이라도 제대로 먹고 싶어 지니까!"그런 게 지나의 희망 일지 모른다.
국경을 넘거나 벙커를 찾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희망. 과거를 떠올리며 불행해하는 대신, 좋아지길 기대하며 없는 희망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대신 지금을 잘 살아 보려는 마음가짐.
이 글을 읽으며 아주 오래전 고등학교 시절쯤
주말 낮시간에 텔레비전으로 본 영화가 생각났다. 세계 2차 대전 당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살던 젊은 유대인 부부의 이야기였다. 전쟁 중에 도망가지 못하고 집안에 고립되었던 부부는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는데
먹을 것이 동나기 시작하고, 집안으로 날아든 비둘기를 잡아먹기도 하며 버티다가 마지막 감자 한 알만이 남게 되었다. 두부부는 어쩌면 생의 마지막 식사가 될지 모를 마지막 감자를 삶아서 먹기로 했다. 마지막 식사를 위하여 젊은 부부는 우아한 드레스와 멋진 턱시도를 차려입고 포크와 나이프, 근사한 접시를 준비해서 한알의 감자를 반으로 나누어서 접시에 담아 스테이크를 먹듯이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 장면이 기억에 남았다.
품위를 지킨 다는 것, 부끄러움을 아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에는 매일의 수고가 필요하다. 코 앞에 있을 것 같은 어둠과 상실에서 고개를 돌리는 것에는 생각보다 큰 힘이 필요하지 않다. 걷기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장을 봐온 신선한 식재료로 나물을 무쳐 소박한 음식을 만들어 먹고, 마법처럼 쌓이는 설거지를 하고, 욕실의 머리카락을 치우는 단순함이면 족 하다. 평범에 평범을 더하고, 하루에 하루를 덧 붙여 일상을 이어간다. 오늘의 장막 뒤에는 어떤 내일이 다가올지 모르나, 나는 감자 한 알만큼 은은한 희망을 심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