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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방에 사는 여자 Oct 05. 2023

갈치조림이야기

올해부터 시댁에선 명절에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남편의 사촌 큰 형님께서 몇 해 전 돌아가고, 사촌 큰 형수님께서는 윗분들의 제사를 지내지 않겠다고 선포하셨다. 결혼 후 사십 년 동안 지내온 제사이니 그럴만하셨다.

그렇다고 다른 형제들이 부모님 제사를 가져가는 것도 아니고, 여러 사정 등으로 서로  왕래를 안 하고 지내셨다. 우리 시댁은 아버님 제사를 명절에 계속 지내왔는데, 작년 추석 차례를 지내고 회의를 한끝에 할아버님 할머님제사를 안 지내는데 아들인 아버님의 제사를 지내는 것은 도리에 어긋 난다는 결론에 다다르고 올해부터 안 지내는 것이다. 상당히 유교적인 결론이다. 아마 기제사도 우리 대까지 이어지다가 없어질 것이다.


예전 같으면 추석전전날 시댁에 도착하고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부터 음식을 만들고 하루종일 노동에 시달리고, 추석 당일은 상 차리고 설거지하고 정신이 없을 때인데

추석 당일날 추모공원으로 모이면 되니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싶었다.



제법 이른 시간에 추모공원에 도착했는데 벌써 성묘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 이제 막 들어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마도 이제는 집에서 제사를 안 지내고 간단한 음식을 준비해 와서 성묘를 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싶었다. 자신이 직접 전투를 해서 얻은 전리 품도 아니고, 명절 치르느라고 고생했다고 부인 어깨를 주물러 주거나 맛있는 것 사준적도 없는 남편은 진작 이렇게 해야 했다고  생색을 내었다.



테이크 아웃해 간 커피를 마시며 두리번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멀리서 둘째 형님 내 부부가 올라오는 게 보여서 손을 흔들어 인사를 했다. 남편이 "애들은?"하고 물으니

"출근해야 해서 안 왔어요"라고 형님이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남편이 "우리 애들도 안 왔어요!" 하니"억지로 하면 쌈 나 애들 하는 대로 그냥 둬야지"한다

얼마 전 어머님 생신에 애들 안 데려 왔다고 한소리 하던 것과는 또  다른 모습이다.

아마 그때는 오랜만에 두 아이들 앞세워 참석했기 때문일까? 잔소리를 듣다 듣다, 아이들이 오기 싫다고 했다는 말을 하니 농담 식으로 "그럼 뭐 인연을 끊자는 것이여?" 했고,  조카들 중 누군가 " 와! 꼰대다!" 하며 분위기가 풀렸었다. 남편은 그 옆에서 말없이 고기만 우걱우걱 씹었다.



딸아이는 많은 친척들의 한마디 한마디의 외모 비하 비교 때문에 상처 입고 급기아는 더 이상은 친척들이 많이 모이는 명절에는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얼굴이 크네, 키가  작네,  다리가 굵네, 여드름  난 거 봐라, 어릴 때는 되게 이뻤는데, 지나가는 한마디로 아이는 상처를 입는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아이들에게는 지켜야 할 예의와 인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다른 예쁜 사촌의 외모만 늘 칭찬해서 아이는 끝없는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그렇게 출중한 외모의 소유자들이 아니었고, 그냥 생각 없이 하는 말이었다.

불편하지 않은 관계에서 나타나는 불합리함이다.

나는 명절에도 애들 공부하라고 집에 두고 안 데려오는 못된 엄마로 찍혔다. 정작 아이들은

늦게 까지 자고, 영화 보고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나는 매번 아이들 좀 데리고 오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반짝반짝 날씨가 좋았다.

옆의 가족들은 돗자리를 깔고 소풍 나온 듯  웃으며 과일과 떡을 먹었고, 대여섯 살쯤 된 사내아이 둘이 폴짝 뛰자, 할머니가 와락 아이들을 안고 엉덩이를 토닥여 주었다. 이토록이나 많은 사람들이 입은 옷도 비슷하고 준비해 온 음식도 비슷하다는 것이 놀랍고, 생김새도 그만 그만하다는 사실이 신기했고, 또 다르다는 것이 더 놀라웠다. 죽은 자를 보기 위한 하나의 목적으로 이 많은 사람이 모였다니 훗날 나의 무덤엔 누가 나를 그리워하며 찾을까 생각해 보았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곳에 모인 어느 누구도 나를 그리워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관계의 차가움이다. 한때는 사는 게 무덤 속 마냥 아득하고, 외로운 날들이 많았다. 살아내야 했던 날들, 묵묵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화장실에 다녀오니, 시어머님과 아주버님 형님들이 도착해 계셨다. 시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니 "너는 안 보이고  넷째만  왔다 갔다 해서 너는 안 왔는 줄  알았다!" 하신다."명절인데 왜 안 와요?" 하니 큰 아주버님께서 "넷째만 서 있길래 제수씨 안 왔는 줄 알고 서로 물어보지 말라고 속삭이고 있는 중이었어요!" 한다.

나는 결혼해서 20년 동안 제사나 명절에 빠진 적 한 번도 없었다. 내가 안 왔다고 생각되었으면, 왜 안 왔는지 전화해서 나에게 물어봐야 하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일 내가 명절에 시댁에 안 갔다면 필히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이므로.

그러나 묻지 않음으로써  나는 화장실에 다녀온 잠깐 사이에 명절에도 오지 않는 며느리로 치부되는 것이다.



남자 형제가 없던 나는 시댁에 시아주버님들이

많은 것이 좋았다. 없던 오빠가 생긴 것 마냥 든든했다. 물론 그런 나의 착각은 나에게 소리 지르는 남편을 혼내지 않고 방관하는 모습을 보면서 깨졌다. 큰 시아주버님이 작년에 정년퇴직을 하셨을 때,

일찍 돌아가신 아버님의 자리를 대신해 어머님 모시며 고단하게 살 오신 아주버님께 감사의 마음을 담에 백화점 상품권을 제법 큰 금액으로 보내드렸다. 형님과 두 분이 겨울 코트라도 좋은 것으로 장만하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선물을 받으신 아주버님께서 역시 제수씨 밖에 없다, 고맙다, 성질 더러운 동생이랑 사느라 고생하셨다. 내가 그동안 말을 안 했어도 제수씨한테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다. 등등의 말씀을 하시길 아마도 기대했었나 보다. 그러나 답장도 전화도 없으셨다. 한 줄의 감사함도 없으시고, 다음날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하셨다 한다.

남편 역시 자신은 생각을 못했는데 아내가 알아서 한일이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

남편에게서도 받지 못하는 존중을 시댁의 누구에게 받을 수 있을까? 허허로운 것이 가족이라는 허울만 쓴 관계들이다.



처음 보았을 무렵, 학생이었던 조카들이 어느덧 결혼들을 하여서 아이들의 엄마, 아빠가 되었다.

세월은 흘러서 세상에는 새로운 인연으로 아이들이 태어 난다. 끊임없이 변하고 성장하는 것 같으나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다.

명절에  시댁에서 음식 장만하는 것이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전 부치고 나물 무치고 하면서 형님들과 떠는 수다도 재미있었고, 따끈할 때 집어먹는 전도 맛있었다. 며느리들은 종일 주방에서 일하고 어머님과 아들들은 맛있는 음식 먹으며 그들만의 인생이야기를 나눴다.

다만 함께가 아니었을 뿐, 종일 설거지통에 처박혀 있다 보면 누가 왔다 갔는지, 다들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 며느리들은 또 서로 한편 먹는 것이 아니라 은근한 무시와 방관의  오묘한 세계가 있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헛갈리는 관계. 서로의 행복을 베틀 하고, 불행위에 불행을 덧 입혔다.



대 가족이 단골 식당으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고 어졌다. 우리 형제들은 형님댁으로 가서 커피와 과일을 먹고 한 시간가량 머물다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내려가는 길, 올라가는 길 모두 차가 막혔다. 큰 형님께서 제주여행 갔다 오시며 사 오신 갈치를 싸주셨다.

일 안 하고 다녀왔어도 피곤 한지 차 안에서 꾸벅꾸벅 졸았다.


싱싱한 갈치조림으로 저녁을 차렸다.

형님께 맛있게 먹었다며 사진과 인사를 보냈으나 역시나 답장이 없으셨다. 생신 때 쿠폰을 보내 드리니  처음에는 자네 덕분에 이러 걸 다 받아 본다며 즐거워하시더니 몇 번 반복되자 귀찮으신지 시큰둥해지셨다. 



세월과 헌신과 착함으로  애정과 존중을 받을 수는 없다. 다만, 그 귀중한 것을 기꺼이 내어 줄 사람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나는 작고 사소한 나눔과 감사가 삶을 더욱 살만한 것으로, 행복한 것으로 만들어 준다고 믿는다.

저녁에는 보름달을 보며 걸었다.

이런 날도 있구나, 낯설고 가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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