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타리를 다섯 단을 사다가 흐르는 물에 살짝 헹궈서 절여놓았다. 알타리 무는 절이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찹쌀로 물게 풀을 쑤어 베란다에 내어 놓고, 쪽파를 다듬기 시작했다. 파가 잘아서 까는데 품이 많이 들었다. 쪽파를 다 까고 일회용 장갑을 그대로 낀 채 마늘과 생강을 깠다.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베란다로 나가서 알타리를 한번 뒤집어 주었다. 양파 껍질도 벗겨 놓고. 마늘과 쪽파를 씻어서 체에 받쳐 놓았다.
알타리 무가 잘 절여져서 부드럽게 구부러지자
커다란 플라스틱 다라에 쏟고, 수도 물을 수압이 약하게 틀었다. 철수세미로 총각무 표면을 살살 문질러서 닦았다. 김장무 닦듯이 너무 세게 닦으면 무 표면이다 벗겨진다. 과일 깎는 작은 칼로 뿌리와 잔털들을 정리하고 구정잎을 떼어냈다. 하나하나 흐르는 물어 씻어 가며 알타리를 파란색 소쿠리에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맑같게 씻긴 알타리들은, 이유식을 다 먹고 금방 세수를 끝낸 아기 얼굴처럼 뽀얬다. 물이 빠질 동안 잠시 소쿠리에 밭쳐 놓고, 마늘과 생강, 양파를 믹서기에 넣고 갈았다.
빨간 다라를 주방으로 들고 와서, 물이 빠진 알타리를 쏟고, 고춧가루와 식은 찹쌀풀, 갈아놓은 양념들과 설탕, 삼 년 전에 담가 놓은 매실 엑기스를 부었다. 쪽파는 썰지 않고 그대로 넣고 갓은 삼등분으로 썰어서 버무렸다. 아차차! 소금과 액젓을 빼먹을 뻔했다. 새우젓도 반 수저 넣었다. 김치통에 넣어서 한통은 주방 구석에 두었다. 익는데 며칠은 걸리는 총각김치를 조금이라도 빨리 익게 하기 위해서다. 남은 총각김치는 작은 통에 담아서 베란다에 내놓았다.
동생에게 갈 김치다.
다음날 베란다에 있는 김치를, 김장용 비닐봉지 두 겹에 캐이블 타이로 단단하게 묶고. 귤 박스에 넣고, 박스 테이프로 꼼꼼하게 포장을 하였다. 장바구니에 넣어 끌고 우체국으로 가서 택배로 동생에게 보냈다.
십 년째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그해부터 동생에게 김치를 보낸다. 이제는 나이를 먹을 대로 먹어서 김치뿐만 아니라 큰 살림도 너끈히 꾸려도 무방할 동생은 결혼 안 하고 혼자 산다. 김치는 물론이고 음식은 거의 만들어 먹지 않고, 배달음식이나 인스턴트에 의존한다. 동생에게 " 이제는 나이도 있으니 번거롭더라도, 건강을 생각해서 음식을 만들어 먹어"라고 잔소리도 하곤 하지만 내 말을 잘 듣지 않는다.
김치는 연결의 끈이다.
덧정 없는 동생은 살가운 편이 아니라서 속에 말을 잘 나누지는 않는다. 다만, 세상 혼자인 것 같은 저녁이라도 밥 먹을 때만큼은 잠깐이라도 누군가 염려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것을 알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손가락 한끝이라도 맞닿은 느낌으로도 세상은 살만하지 않던가!
은유 작가는 '해방의 밤'이라는 책에서 연결되려는 싸움이라 적었다. 주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글을 써온 작가는 그럼에도, 연결되려 애쓴다고 했다. 작가는, 명절에 엄마가 안 계신 친정으로 가면서, 아버지, 오빠와 함께 먹을 한 끼의 음식을 바리바리 싸들고 가면서도 마음이 불편하다. 엄마가 안 계신 지 오래되었는데 그들은 왜 음식을 만들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은유 작가는, 명절 철폐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아버지와 밥 먹지 않기도 아니고 집을, 밥의 즐거움을 되찾는 장소로 만드는 것을 바란다고 하였다. 그래서 끊어 내지 않고 연결되려는 싸움을 계속하는 것이라고 썼다.
마크 안드레 로빈손의 작품에서는 연결에의 의지가 느껴진다. 스스로가 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존재라는 불안을 드러낸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나보다 귀한 존재도 없고 나 보다 보잘것없는 존재도 없다는 생각이 읽힌다. 모양도 색도 제각각인 의자들은 서로를 지탱하는, 내어 주려는 마음으로 얽기섥기 이어져있다. 그럼으로써 지탱하고 아치형의 형태를 이룬다.
다음날 동생은 총각김치 맛있다며 엄지 척 이모티콘을 날렸다. 그나마 줄 것이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