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공간
카페에 갔을 때 좋은 공간에서는 집중이 참 잘되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책을 읽으면 책이 술술 읽히고, 글을 쓰면 글이 술술 적혔다. 그런 점에 대해서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내와 연애 시절에 좋은 카페에 가게 되면, 자연스레 책이나 노트를 꺼내곤 했다. 커피를 마시다가 노트를 꺼내고 할 일을 정리하거나, 생각나는 글을 적기 시작하곤 했다. 어쩌면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건 공간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닐까.
나와 아내는 신혼여행으로 파리에 갔다. 파리에서 10박(이었던가?)을 꼬박 지냈는데,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 파리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여행 중에 즐거웠던 순간을 꼽자면 공원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넓고 넓은 공원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내고, 책도 읽고 공을 차는 아이들도 보고, 돗자리 위에 벌러덩 누워있는 사람들도 보고, 책을 얼굴에 덮고 햇살 아래에서 잠을 자는 사람도 있었다.
파리는 곳곳에 크던 작던 공원이 있었고, 공원마다 한가로운 잔디밭과 빼곡한 사람들(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한가롭고 평화로운 잔디가 펼쳐져 있고, 그 위로 많은 사람들이 누워 있고, 앉아 있고, 걷고 있었다. 한국에 돌아와 파리를 돌이켜 봤을 때, 가장 부러웠던 것은 단연코 그런 공원 풍경이다. 아무튼 우리는 여행 기간 중에 반나절을 일부러 시간 내어 공원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음악도 듣고, 살랑이는 바람도 쐬고, 가끔 날아오는 흙먼지도 마시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정말이지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만 그런지 모르겠지만, 꼭 그런 평화롭고 한가로운 공간에서는 한적하게 시간을 보내고 싶어,라는 마음이 들면서 책을 읽고 싶어진다. 책을 읽는 것이 한가로움과 같이 붙어버린 것처럼. 한가롭지 않아도 책을 읽어야 마땅하겠지만, 한가로울 때면 책을 읽고 싶어진다. 그런 성향은 파리 공원에서뿐만 아니라, 카페에 가서도 평화롭고 한가로운 좋은 기분이 들면 책을 읽으며 커피나 진탕 마시며 시간을 보내고 싶다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책 읽기 좋은 공간인가. 이건 내가 나름대로 세워놓은 카페를 판단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책 읽기 좋은 공간은 어떤 공간인지 세세하게 늘어놓지는 못하겠지만. 카페에 방문해서 보내는 시간 동안 책이 잘 읽히는 곳이라면, 나는 재차 방문하기도 한다. 무엇이 독서의 기분에 들게 만드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공기감이 있다. 편안하고 한가로운 어떤 분위기에서 나는 어깨가 늘어지고 호흡이 부드러워지고 주위 소리가 세세하게 들린다. 커피 향도 부드러워지는 것 같고, 머릿속이 한결 차분해진다. 어지러웠던 흙탕물이 가라앉아 맑아진 기분이다. 그렇게 되면 ‘자자, 어디 책이나 읽어볼까’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곳이 참 좋은데. 사실 마음처럼 찾아지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날의 날씨와 나의 기분과 그날의 공간의 분위기나 손님들이 한데 어우러져 우연의 일치처럼 딱 맞아떨어져서 생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에 책이 가장 잘 읽혔던 곳은 수원에 있는 작은 도서관이었다. 30평도 되지 않은 것 같은 오래된 옛날 도서관이었다. 1층은 공부할 수 있는 열람실이 있고, 2층으로 올라오면 전자정보실과 책들이 모여 있는 종합자료실이 있다. 종합 자료실을 들어가면 한쪽에는 그날 새롭게 받은 신문들이 줄줄이 꽂혀 있고, 그 뒤로 잡지들이 놓여 있다. 그리고 넓은 테이블 하나와 좌석들이 있어서, 동네 어르신들이 신문을 보고 계셨었다. 그 뒤로는 전부 어릴 때 학교 도서관에서 본 것 같은 짙은 갈색의 나무 책장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출입문 옆에는 두 분의 사서가 앉아 있고, 그 옆으로 나 있는 창문을 따라 조그맣게 소파와 좌석이 있었다.
빼곡한 책장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책장 사이에서 누군가를 만나면 도저히 지나갈 수 없는 수준이었다. 아래에 있는 책을 보려고 쪼그려 앉으면 엉덩이가 반대쪽 책장의 책을 밀치곤 했다. 비스듬하게 상체를 기울여야 찾아야 했다. 그런 도서관에 매번 찾아가서 눈에 잡히는 대로 책을 고르고, 구석진 창가 소파 자리에 앉아 햇살을 쐬면서 책을 읽으면 졸음이 솔솔 찾아온다. 그럼 꾸벅 졸았다가 다시 눈 뜨고 책을 읽고는 했었다.
아쉽게도 거기만큼 책이 잘 읽힌 곳은 아직 찾지 못했다. 그 도서관이 집에서 가까우면 좋으련만, 집 가까이에 있는 도서관들은 새롭게 리모델링을 한 탓에 넓고 쾌적한 환경이 되어버렸다. 낡고 비좁고 편안한 분위기와는 다르게, 깨끗하고 넓고 쾌적한 공간이 되었다. 더 좋은 환경에서 책을 읽으세요,라는 게 리모델링의 취지일 텐데. 아쉽게도 나에게는 반대의 효과가 돼버렸다. 자고로 낡고 비좁고 구석진 곳에서 바퀴벌레처럼 음침하게 사각사각 책을 보는 게 더 좋은데 말이지(흠, 저만 그런 걸까요?).
아무튼 책 읽기 좋은 공간이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 있다. 반대로 생각해서 책 읽기 좋은 공간은 그만의 평화로운 공기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어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책을 펼치게 되는 공간이면 좋겠다. 간혹 카페들 중에 그런 곳들이 있다. 별다른 안내가 없어도 손님들의 행동이 달라지는 공간. 자연히 목소리가 낮춰지는 공간. 주위의 공기에 귀를 기울이고 창밖을 바라보게 되는 공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공간이 만드는 공기 속으로 스르르 밀려 들어가는 기분이 드는 곳이 있다. 그런 기분이 드는 공간이면 좋겠다. 책을 읽어주세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책을 펼치게 되면 말이지.
기본적으로 나는 그런 결의 공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나도 시도해보지 않아 만들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런 공간은 대체로 선명한 일관됨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손님이 이 공간을 어떻게 소비했으면 좋겠어,라는 그림을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일관되게 그리는 셈이다. 이를테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마주할 풍경부터, 그때 느끼게 될 기분, 문의 무게나 촉감. 문 밖에서 은은히 들려오는 음악. 문을 열자마자 확 느껴지는 커피 향. 문을 지나고 들어왔을 때 시선에 닿는 것들. 좌석이나 메뉴들, 음악이나 소품들까지. 그런 요소요소가 어떤 의도를 품고 일관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러면 아마도 손님은 그런 경험에 압도되어 자신도 모르게 공간 속으로 스르르 밀려 들어가지 않을까. 그렇게 공간에 스며든 손님은 말할 수 없어도, 이 공간이 주는 이야기를 알아챌 것이다는 게 내가 생각하는 공간의 힘이다. 그렇게 되면 책을 읽어주세요-라는 과장된 장치가 없어도 책이 읽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책상 이론을 가지고 있긴 합니다만.
아무튼 저는 그런 공간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는 편입니다. 실제로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가능할지는 이제 직접 부딪히면서, ‘아아, 이건 여러모로 현실적인 부분들을 고려해 보니 정말 너무 어려운 일이구나’라고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죠. 그래도 해 보는 거죠, 뭐.
그동안 무수히 많은 카페들을 다니면서, 나는 이런 공간이면 좋겠어. 이런 공간이 우리 집 가까이에 있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들을 차곡차곡 쌓아 상상과 책상 이론(실행하지 않고 머리로만 생각하는)을 가지고 있는데.
나는 카페를 통해 무엇을 이루고 싶은가.
그리고 그걸 이루려면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에게 커피와 카페는 어떤 것이며,
내가 만들고 싶었던 공간은 어떤 모습인지.
이런 요소들을 잘 가다듬어 정리한 다음, 한데 모아서 덜고 더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내가 생각하는 카페의 윤곽이 드러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창업 준비를 하나씩 진행해 왔는데요. 흠, 이렇게 하는데 족히 2달은 걸린 것 같습니다. 내가 그동안 상상하던 것들도 글로 정리하려고 하니 쉽지 않군요. 하지만 정리하고 나니 두리뭉실했던 상상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습니다.
창업 순서
1. 큰 비전을 세워라.
2. 비전을 해체하여 구체적인 모습으로 만들어라.
3. 나에게 커피/카페란?
4. 나는 어떤 공간을 만들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