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조림
나는 호불호가 명확한 사람이다. 늘 이건 싫고 저건 좋아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어느 날 조카 1호와 대화를 하는 도중 작은올케가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조카와 얘기를 할 때도 특정 주제가 나오면 "고모는 이건 좋아해, 근데 저건 싫어해."라는 형식의 말을 굉장히 자주 한다는 것.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다. 나는 호불호가 너무나 명확한 사람이다. 다 괜찮아.라는 말은 선택지 중에 불호 또는 극호가 없다는 뜻이라는 것. 이런 나는 취향이 대쪽 같은 편이다. 이런 대쪽 같은 취향은 영화에도 고스란히 반영된다. 감정선을 오래 끌고 가는 영화는 거의 보지 않는 편이다. 하이테크놀로지 신봉자이면서 SF영화는 좋아하지 않고 오컬트, 공포, 르누아르는 싫어하는 편이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판타지장르나 내가 힐링장르라 부르는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회사일에 치이고 힘들 때면 특히나 힐링 영화를 보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름 붙인 대로 나에게 힐링을 주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주로 보던 영화를 계속 다시 보는 편인데 특히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리틀 포레스트이다. 오리지널 리틀 포레스트도 몇 번이나 봤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다. 김태리 배우가 주연으로 나온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가 처음 나왔을 때는 익숙했던 오리지널과는 느낌이 달라서 한 두 번 정도 보고는 보지 않았는데 회사를 다니면서 외국어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은 상태가 되자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를 자주 보게 되었다. 한국판 리틀 포레스트는 사계절이 모두 나오기 때문에 어느 때나 나를 위로해 주는 느낌이랄까? 오리지널과 한국판 어느 편이든 늘 따라 하고 싶었던 요리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해보고 싶었던 요리는 밤조림이었다.
몇 년 전 지금은 사라진 동네 과일가게에서 밤을 팔았었다. 심지어 밤 깎는 기계로 완벽히 깨끗하진 않지만 조금만 손질해도 뽀얀 속살이 드러나는 밤을 팔았다. 한 번은 밤을 사 와 조림을 만들었는데 리틀 포레스트의 그 느낌은 아니었다. 율피가 있어야 리틀 포레스트의 그 밤조림이 완성될 것 같았다. 그러나 밤을 사서 손질하는 것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속 깊이 넣어두었던 밤조림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이번 가을에 왔다.
조카 1호의 농구대회가 있던 날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사는 조카와 친한 4학년 형의 가족을 농구코트에서 처음 만나 인사를 했다. 조카 1호의 육아에 많은 관여를 하고 있지만, 그래도 학부모와의 만남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기에 나는 너무나 어색했다. 조카와 4학년 형은 같은 팀이었는데 아주 빠르게 예선에서 떨어졌다. 내가 봐도 참 못했다. 같이 지켜보던 동생은 농구를 해 봤으니 이제 축구를 시켜볼까?라고 했다. 그렇게 우리는 어차피 빠르게 떨어진 거 집에 가서 쉬자고 했다. 그렇게 체육관을 나오는데 4학년 형이 제발 조카를 자기들과 함께 밤을 주으러 가게 해달라는 것. 4학년 형의 어머니도 잘 돌보테니 데려가겠다고 하셨다. 그래도 산으로 밤을 주우러 가는데 아이만 덜렁 보내는 것은 너무나 민폐인 것 같아 앙해를 구하고 다 같이 밤을 주우러 가기로 했다. 처음 보는 가족들과의 산행이라니 너무나 어색했다. 깊숙한 파주 어느 산으로 향했다. 동네 주민들이 늘 밤을 주으러 오는 산이라고 하셨다. 높은 산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산은 산이라 나름 험했고 조심해야 했다. 4학년 형의 가족이 준비해 주신 목장갑을 끼고 비닐봉지를 하나 들고는 그렇게 내 인생의 첫 밤 줍기를 시작했다. 밤송이 안에 알이 꽉 찬 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봤다. 산을 오르며 열심히 밤을 주웠다. 동생부부는 왜 이렇게 열심히 줍냐고 했다. 나도 모르겠다. 날씨도 너무 좋았고 산을 오르면서 흘리는 땀도 좋았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한 장면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었다. 강원도 정선 사람이 밤을 처음 주워보는 게 더 신기하다는 올케의 말과 밤 주으러 많이 다녔다는 동생의 말이 옆에서 들렸다. 아랑곳하지 않고 밤을 주웠다. 조카보다 내가 가장 신난 일요일 오후였다.
그렇게 열심히 주워온 밤을 드디어 손질할 때가 되었다. 물에 베이킹 소다를 조금 풀고는 밤을 가득 담아놓고는 동네 마트에 가서 밤 깎는 가위와 목장갑을 사 왔다.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리틀 포레스트를 보며 밤을 깎았다. 한 시간 넘게 물에 불려진 밤은 생각보다 너무 쉽게 단단한 껍질을 벗길 수 있었다. 고르고 골라낸 밤이었지만 벌레가 있는 밤이 여러 개 나왔다. 아무 생각 없이 벌레 먹은 밤을 모아 쓰레기봉투에 담았다가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 (1인가구는 쓰레기 양이 적다.) 세탁실 바닥에 정말 크고 통통한 구더기... 아마도 애벌레가 두 마리 기어 다니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다.
율피가 남겨진 밤을 그대로 베이킹소다 한 숟가락을 푼 물에 밤새 담갔다. 그리고는 다음날 그래로 40분을 천천히 삶아 냈다. 그리고는 물에 헹구고 다시 삶고의 반복 그러다 보면 율피도 얼마나 부드러워지는지 그리고 온전한 맘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약한 것들은 깨지고 부스러졌다. 중간중간 한 번씩 밤을 또 정리해 줬다. 그러다 보면 또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벌레 먹은 밤이 나왔다. 생각보다 많이 나왔다. 야생에서 그냥 자연이 키운 밤이라 그런지 온전한 밤이 많지 않았다.
몇 시간에 걸친 밤손질이 끝나고는 드디어 설탕을 넣고 밤을 조릴 시간이 되었다. 유리병 두 개를 끓는 물에 소독하고 잘 씻어 놓았다가 조려진 밤을 담았다. 온전한 모양을 갖고 있는 밤과 부서진 밤을 구분하여 담았다. 그 많던 밤을 손질하면서 골라내고 하다 보니 얼마 남지 않았다. 이틀에 걸쳐 만들기엔 마음만 뿌듯했다.
밤을 원래 좋아하지 않는 나는 단지 가을이라는 계절과 시간을 느끼며 이 행위가 하고 싶었다. 가을을 가득 담은 밤은 눈이 펑펑 오는 겨울에 하나씩 꺼내 먹으며 추억해야지. 그리고 이번 겨울 눈이 펑펑 오는 날엔, 롤케이크를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