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30분에 집을 나선다. 동두천에서 열리는 코리아50K 트레일러닝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2019년 얼떨결에 철인클럽 친구들과 이 대회에 참가하면서 트레일러닝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는 코로나로 잠시 잊고 있다가 2022년에 어렵게 대회가 재개되면서 다시 참가할 수 있었고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그냥 걸어도 힘든 산길은 왜 뛰냐고 묻는다면 딱히 할 말은 없다. 그냥 좋으니까. 진달래 개나리꽃이 여기저기 피어난 산길, 파란 녹음이 우거진 오솔길, 한참 뛰다 보면 만나는 시원한 계곡길, 빨간 단풍이 물든 산속의 낙엽이 가득 쌓인 길, 하얀 눈이 쌓인 순백의 길과 그 위에 포개지는 나의 발자국들... 뛰면서 올려다보는 푸른 하늘과 구름, 산정상 바위 위에 올라서서 바라보는 도시의 모습, 그저 작게만 보일 뿐이다.
그러나 산속의 길은 그리 만만치 않다. 가파른 벼랑길, 아찔한 암릉길, 징그러운 너덜길, 미끄러운 진흙길,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길, 끊어진 계곡길… 날씨도 중요한 변수다. 산 아래에는 쨍쨍해도 높은 산에 오르면 날씨는 급변한다. 비바람이 치기도 하고, 운무가 끼어서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고, 기온이 떨어져 저체온이 오는 경우도 있다. 야간 트레일런은 더 힘들다. 어두운 밤길을 지나야 하는 어려움도 있지만 자연적인 생체리듬으로 잠과 피로가 몰려와 집중하기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회에서 요구하는 필수장비는 무겁더라도 반드시 챙겨야 한다. 이렇듯 도처에 위험요소가 많지만 신기하게도 트레일런을 하면서 큰 부상을 당하는 경우는 드물다. 나의 경우에는 발목을 삐거나 넘어져 찰과상이 생긴 정도가 전부다. 돌이 많은 내리막길을 빠르게 뛰어내려오면서 착지할 곳을 계산해서 의식적으로 정하지 않았는데도 무의식적으로 이미 두세발 앞을 정확하고 안전하게 착지하는 경험을 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신기하게도 우리 몸은 어떤 상황에서도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Korea50K는 골든벨, 실버벨 시상이 있는데 남자의 경우 골든벨은 8시간 30분 이내 완주, 실버벨은 9시간 30분 이내 완주자에게 금종과 은종이 각각 주어진다. 트레일런에 사용되는 종은 원래 유럽의 목동들이 사용하던 것이라고 하는데 우리에게는 CP(체크포인트)를 알리는 반가운 종소리다. 여기서 에너지를 보충하거나 휴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장 친구 게으르미는 같이 북한산을 뛰면서 ‘골든벨’, ‘실버벨’ 대신에 전래동화에 나오는 ‘금도끼’, ‘은도끼’도 아닌, ‘금망치’, ‘은망치’라고 부르면서 꼭 받고 싶다고 했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친구에게 금망치와 은망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전염이 되었는가 나도 망치 하나 받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났다.
작년에는 날씨가 덥고 습해 많은 참가자들이 중도 포기했었는데 올 해는 비가 예보되어 있다. 전날 내린 비로 바닥은 젖어 있었지만 다행히 출발할 때는 비가 오지 않아 친구들과 기념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어본다. 그리고, 출발신호와 함께 많은 참가자들에 휩쓸려 아직 어두운 동두천 운동장을 빠져나왔다. 조금 뛰다 보니 몸이 더워져 일단 방수재킷을 벗고 뛰었다. 작년에 30km 이후 무릎이 아파서 힘들었던 기억이 나서 초반에는 절대 무리하지 말자고 주문을 외워본다. 그리고, 올해는 작년과 달리 스틱을 가져와서 내심 마음이 편했다. 왕방산과 같이 가파른 산을 오를 때 체력소모를 줄여줄 뿐만 아니라 내리막에서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고 무릎에 충격을 분산시켜 주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스틱은 신의 한 수였다.
처음에는 비가 보슬보슬 오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빗방울이 점점 굵어졌다. 오슬오슬한 한기가 느껴졌지만 방수재킷을 덧입는 대신 계속 움직여서 체온을 올리는 쪽을 택했다. 가파른 언덕은 빨리 걷기, 완만한 언덕은 천천히 뛰기 또는 걷뛰, 평지와 내리막은 쉬지 말고 뛰기… 이런 나름대로의 트레일런 루틴을 지키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래도 오늘은 긴 오르막 임도와 포장도로에서 대부분 걷지 않고 뛰었다. 코스 중간을 넘어서면서 예상 완주시간을 계산해 보니 이 페이스대로 간다면 금망치도 가능할 것 같았다. 금망치가 눈에 아른거린다, 열심히 뛰어보자구...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초반에는 스틱 덕분에 아슬한 곡예를 하면서도 어느 정도 뛰어갈 수 있었는데 계속 내리는 비에 여기저기 내리막 길이 진창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곳곳에 정체가 생겼다. 아무리 살살 엉금엉금 조심해서 내려와도 어느 순간 쭈욱 미끄러져 넘어지면 저마다 다른 표정으로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나도 수없이 넘어졌다. 한 번은 넘어지면서 들고 있던 스틱 하나가 위쪽으로 내동댕이 쳐졌는데 경사가 가파른 진흙길이어서 계속 미끄러지는 바람에 일어나 되돌아 올라갈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땅바닥에 누운 채로 나머지 스틱을 길게 뻗어서 끌어내렸다. 진흙탕 속에 누워있는 내 모습, 자연과 하나가 된 나 자신을 보면서 한바탕 웃음이 나왔다. 하하하하~~
후반에는 20km 코스와 합쳐지면서 병목현상이 더 자주 생겼다. 마음이 급해도 병목구간에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다. 금망치가 안된다면 은망치라도 받으면 되지 뭐~~
마지막 CP에서 내려와 도로 구간을 지나고 운동장으로 들어가는 산길에 들어서면 몸은 피곤해도 이제 다 왔구나 하는 안도감에 에너지 레벨이 다시 올라간다. 드디어 사회자의 마이크 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이 왔다. 이제 멋진 포즈로 피니쉬 라인만 통과하면 된다.
*** 총 거리 53.5k, 누적상승고도 +3380m, 완주시간 09:00:37 (9시간 37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