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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Oct 15. 2020

산책

산골 아침을 걷다

강원도 산골에 몇 차례 벗들이 다녀갔습니다. 문제는 술입니다. 인적없는 산속에서 밤을 보내다 보면 누구랄 것 없이 술잔을 비우게 됩니다. 늘어나는 술 병 만큼 이야기는 길어지고 밤은 깊어갑니다. 그렇게 늦도록 놀다보니 새벽 시간은 몽땅 지워지고 맙니다. 더불어 오직 그 시간에만 맛볼 수 있는 즐거움도 날아갑니다. 그들이 놓쳐버린 건 산책의 정수입니다. 매번 아쉬웠습니다.


왕복 2km 남짓 짧은 길입니다. 멀리 소실점 어떤 풍경이 있을까요?


산속 공기와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안개가 어우러내는 경치 속으로 한 발 한 발 나를 들이밉니다. 우람한 소나무와 육감적인 물푸레나무를 사열하고, 애기 손가락 같은 단풍나무 어린 잎의 환영을 받으며 걸음을 옮깁니다. 얼굴에 들러붙는 안개가 물방울로 영글 즈음 온 몸의 근육은 이완되고 긴장은 풀어집니다. 자궁을 막 빠져나온 아이가 물속을 유영하듯 실눈을 뜨고 느긋하게 흘러 다닙니다. 밤과 아침 사이 어느 경계에서 자유를 누립니다.


장딴지만한 굵기의 다래넝쿨과 하늘을 휘감아 오르는 칡넝쿨에서 원시의 경외를 느끼기에 이때만큼 좋은 때는 없습니다. 풀 섶에 숨은 벌깨덩굴 보라색 꽃은 이때가 가장 산뜻합니다. 썩은 흙과 썩은 나뭇잎과 썩은 나뭇가지와 썩은 곤충들이 만들어내는 날 것의 지구 냄새가 이때만큼 향기로운 때는 없습니다. 나뭇잎에 매달린 물방울이 햇살을 받으면 하루 중 가장 찬란한 순간이 열립니다. 이때만큼 좋은 때는 없습니다. 산책은 이때가 제일 좋습니다.


구불구불한 길은 어디로부터 흘러와 어디로 흘러갑니다. 문득 되돌아보면 생경하고 낯선 경치가 내 뒤를 받치고 있습니다. 하얀 안개가 몰려가기도 하고 멀리 동해바다 해수면의 장력을 막 떨쳐낸 태양빛이 내려앉는 높은 산의 풍경을 만나기도 합니다.


모퉁이를 돌아 걸어갑니다. 편안한 걸음에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처음 산골과 인연을 맺은 데는 길지 않은 이 길의 영향이 컸습니다. 초행길이라 엉거주춤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습니다. 어느 순간 비포장이 되어 덜컹거리더니 이윽고 어둑한 숲길로 이어졌습니다. 차에서 내려 길과 나무와 숲과 바람과 소리들을 만지며 운명을 예감했습니다. “숲길 끝나는 곳에서 하늘이 펑 하고 열리면 이곳과 연애를 하리라.” 몇 굽이 돌아 작은 다리를 건너자 거짓말같이 환하게 하늘이 열렸고 백두대간의 웅장한 등줄기가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이번에 방문하신 분들은 좋은 시절 좋은 시간에 좋은 산길 그곳을 사뿐사뿐 걸었습니다. 멀찍이 떨어져 사진에 담습니다. 사람 없는 풍경과 사람 있는 풍경이 새삼 다릅니다.


숲길이 끝나고 하늘이 열렸습니다. 몇발짝 더 올라가면 백두대간 등줄기를 만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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