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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Oct 18. 2020

관종유감(關種遺憾)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은 없다

1. J


예민한 상태가 계속됐다. 열화상카메라로 지하철 안을 스캔했다면 A의 머리만 새빨간 공처럼 둥둥 떠다닐 게 분명했다. 출근하는 동안 맞닥뜨리는 모든 게 A를 긁어댔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무신경하게 치고 들어와 진로를 방해하는 사람도 거슬렸고 일없이 팔꿈치를 치고 가는 사람에게도 신경질이 났다. 복잡한 환승통로에서 스마트폰에 고개를 처박고 느릿느릿 걷는 사람도 열불이 났다. 그럴 때마다 인상이 찌푸려졌고 눈총을 쏘아댔다. 뒤통수에 대고 한바탕 욕을 퍼붓고 싶기도 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적당히 완화시켜 받아들이는 감정의 쿠션 기능에 탈이 난 것 같았다.


아침에 커피를 마실 때 아내가 그랬다. “무슨 일 있어? 목소리도 날카롭고, 뭐든 싸우려고 덤비는 사람 같아.” 사실 그랬다.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 봐라 하는 심정이었다. 근래에는 감정이 널뛰듯 춤추는 게 드물었다. 크게 즐거운 일도 없었지만 성질을 돋우거나 억울해서 마음 다칠 일도 딱히 없었다. A의 감정선은 완만한 구릉지대를 힘들이지 않고 가로지르는 기찻길 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평온이 깨진 거다. 얼굴은 열이 올라 화끈거렸고 시선처리에 실패한 눈빛은 불안하게 흔들렸다. 과잉된 감정이 갈피를 잡지 못했다.


A는 며칠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J를 모른다. 연예인인 건 알겠는데 가수인지 연기자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젠더나 반려동물과 관련해 주목을 끌었다는 것이 그에 관해 아는 전부다. 한 세대나 나이 차이가 나고 취향도 달랐으니 관심 가질 만 한 게 없었다. 그런 그가 죽었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젊은이가 어쩌다 그랬을까” 정도였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갖게 되는 가장 보통의 연민 이외에 그의 죽음에 관해 더하거나 덜어 낼 건 없었다. 안타깝지만 우리 곁에 늘상 머물러 있는 수많은 죽음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적어도 전날 저녁까지는 그랬다.


상갓집에서 만난 K와는 안면이 없었다. 동석한 사람이 알고 지내는 사이라 어쩔 수 없이 인사를 나누고 합석했다. 처음 만나거나 낯선 중년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분위기는 서먹했고 대화는 겉돌았다. 신변잡기들이 오갔지만 시답잖았다. 주로 듣는 쪽을 택한 A는 가끔 고개를 주억거리거나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며 불편하고 지루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적당한 예의와 분명한 경계심이 충분히 전달되기를 바랐는데, 이야기에 집중한 K는 이러나저러나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얘기꺼리가 떨어질 무렵 누군가에 의해 J가 화재에 올랐다. J의 빈소는 A가 문상을 간 장례식장의 옆 호실에 마련되 있었다. J의 유명세와 죽음을 다룬 수많은 기사에 비해 상가는 한산했다. K는 “나대긴 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가 말한 ‘나댔다’가 “죽을 만 했다”던가 “그러니 죽었지”라는 뜻은 아니었다. J의 말과 행동이 인터넷이나 SNS에서 회자된 걸 두고 한 말이었다. 타인의 죽음을 건조하게 대하는 게 껄끄럽긴 했지만 그런 태도는 어쩌면 당연했다. K 역시 A와 마찬가지로 J의 죽음, 아니 J 자체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도 A는 ‘나댔다’는 말이 걸렸다. 듣는 순간부터 식도 어디쯤 고구마 한 덩어리가 눌러 앉은 것처럼 답답하고 먹먹했다.


 K는 “나대긴 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K는 해도 그만이고 안 해도 그만인 말을 왜 했을까? J의 어떤 면이 K로 하여금 ‘나댄다’는 평가를 하게 했을까? 죽음 자체가 본인과 무관하다면 생전의 행적에 대해서도 무심한 거리두기를 해야 하는 것 아닌가? K는 J의 지난 삶에 성의 없는 돌멩이 하나를 던졌고, 돌멩이는 이미 세상을 떠난 J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A의 가슴을 쳤다. A는 긴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눈동자에 오른 열을 내리기 위해 이따금 눈을 깜빡여야 했다.


자리에 앉아서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PC를 켜고 기사를 하나 둘 열어보았다. 예전 같으면 눈길이 가지 않았을 기사였다. 인터넷에서는 J의 죽음을 악플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대중의 인기와 관심을 붙들기 위해 J가 계속 이슈를 만들어 냈고, 무수하게 쏟아지는 독한 댓글을 견디지 못해 무너진 거라고 했다. 처음으로 자세히 들여다본 J의 사진에서는 매끈한 콧등위에 선하고 슬픈 눈망울이 얹혀 있었다. 관종, 즉 관심종자(觀心種子)라는 말도 알게 되었다. 사이버 세상이 만든 거라고 했다.


가해는 감각이 제거된 가상 세계에서 이루어졌지만 피해를 입은 건 더운 피가 흐르는 현실 사람이었다. 댓글이라는 바늘은 날카롭게 벼려져있었고 찔린 사람의 살점과 피와 비명이 느껴지지 않아 한없이 무자비했다. 만천하에 노출된 단 한 명과 익명성에 몸을 숨긴 불특정 다수의 싸움, 승패는 뻔했고 결과는 비참했다. 기사를 훑어보던 A는 어느새 인터넷 댓글을 실명으로 하자는 주장에 동조하고 있었다.


따끈한 커피로 입술을 적시며 두근거리는 가슴이 가라앉기를 바랐지만 허사였다. 마음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했고, 한쪽 구석이 찜찜한 채였다. 관심종자라니, 아무리 신조어가 난무한다지만 사람을 일러 종자라니, 너무한다 싶었다. 검색해 보니 일부러 특이한 행동을 해 다른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것을 즐기는 사람 즉, 관심병 환자를 뜻하는 인터넷 용어라고 했다. A는 그 말에 깔린 가볍고 천박한 공격성에 치를 떨었다.


J가 이슈메이커였는지, 혹은 관심병 환자였는지 A는 알지 못한다. 만약 관심병 환자였다면, 환자인 J가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그가 아프게 된, 그러니까 위축되고 압박 받은 이유도 있었겠지만, 어린 나이에 연예계에 발을 디뎠고, 대중의 관심에 부침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그러니까 A는 인간으로서나 연예인으로서나 환자로서나 J에 대해 말 그대로 피상적으로만 알 뿐이다.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J를 아느냐 모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어차피 타인을 모른다. 자기 자신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을 안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A를 당황하게 만든 건 사람들이 왜 J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냐는 거다. 연예인도 관심병 환자도 이슈메이커도 하나의 인간이다. A와 K, 그리고 또 다른 B, C, D처럼 우리 시대를 함께 살아가고 우리 시대를 함께 만들어가는 누군가일 뿐이다. 무슨 일을 하는지, 내성적인지 외향적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혹은 제3의 성인지, 성적 취향이 무엇인지에 따라 색안경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는 한 사람의 인간, 그게 J다. J 역시 “사람이니까”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현미경을 들이댔다. J 스스로 공개하거나 인터넷매체가 막무가내로 퍼 나른 사진과 기사를 보고 평가하고 품평을 했다. 욕을 하고 비난을 퍼부었다. 때로는 상식을 무기로 삼았고 때로는 ‘공인’을 운운했다. 그러는 동안 인간 J는 사라졌다. 각자 입맛에 맞는 면만 골라 영점 타격을 했다. 혐오를 주고받으며 존재를 확인했다. 눈물 그렁한 눈동자에 실어 보내는 J의 구조신호는 사람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거나 무시되거나 왜곡되었다.


결국 J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냈다. 대상화되고 쪼개진 J가 아니라 온전한 인간 J는 그렇게 마지막 순간이 지나서야 관심을 받았다. 사람들은 J를 샅샅이 들여다보았지만 정작 인간 J를 보지 않았다. 사람들은 J를 관종으로 몰았지만, 정작 자신들이 J에게 갖고 있던 무절제한 관심은 돌아보지 못했다. A는 타인의 삶에 지독하고 무모한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짜 ‘관심종자’라고 결론 내렸다. K가 한 ‘나댔다’라는 말은 그런 ‘역(逆) 관종’이 현실 세계에서도, 그리고 젊은 층이 아니라 꽤나 나이 든 축에 속하는 사람에게도 있다는 걸 확인해 주었다.


A는 타인의 삶에 지독하고 무모한 관심을 드러내는 사람들이야 말로 진짜 ‘관심종자’라고 결론 내렸다

더 중요한 건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참지 못한다는 거였다. 자기와 다른 행동, 자기와 다른 취향, 자기와 다른 생각을 못 견디고 불편해하고 힘들어한다. 그리고 공격한다. 온라인에서는 익명을 무기로 삼았고, 오프라인에서는 무의미한 세상 걱정을 방패삼았다. 자기와 다르다는 걸 제외하면 달리 이유가 없었다. 모든 타인을 터부시하고 혐오하는 것, 그리고 결국엔 배제하고 마는 것. A는 지끈거리는 두통의 원인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날 밤이었다.


<수많은 단풍잎이 바닥을 뒹굴지만 똑 같은 나뭇잎은 없습니다>



2. 미아즈마


한 밤중에 잠이 깼다. 머리는 여전히 아팠고, 꿈을 꾸었는지 등에는 땀이 배어 있었다. 다시 잠이 들 것 같아 않아 머리를 식힐 겸 바깥으로 나갔다. 더운 바람이 휘감아 왔다. 공기에 먹물이라도 석여 있는 듯 온통 깜깜했다. 앞을 분간하기 힘들었다. A는 자기 몸에서 나오는 인광(燐光)에 의지해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걸었을까? 커다란 은행나무가 눈앞에 나타났다.


족히 몇 백 년은 되어 보였다. 밑 둥은 몇 아름이나 되는지 가늠조차 어려웠고 기둥에서 뻗어나간 가지들도 하나같이 우람했다. 주변이 잘 정돈된 것으로 보아 예전에는 당산나무 노릇 꽤나 했을 성 싶었다. A가 놀란 건 나무가 뿜는 이상한 기운이었다. 나무 전체에서 아지랑이 같은 게 스멀거리고 있었다. 칠흑 같이 어두운데 음산하고 오싹한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져 잠이 완전히 달아나고 말았다. 무섭기도 했지만 궁금증을 참지 못해 나무에 바싹 다가가 살펴보던 A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나무 전체에서, 아니 나뭇잎 하나하나에서 괴기가 뿜어져 나왔다. 독기는 무척이나 두껍고 넓게 퍼져 있어서 달무리처럼 보였다. 그래서였을까? 나뭇잎은 하나같이 시들했고 바람이 불어도 맥없이 매달린 채 움직이질 못했다. 흔들리는 방법을 잊기라도 한 것 같았다. 영문도 모른 채 자기도 감염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A의 심장은 무섭게 뛰었다.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고 막 돌아 설 때였다. 나무가 말을 걸어 왔다.


“잠깐 제 얘기 좀 들어 주세요. 당신도 제 몸에서 나오는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나요? 으스스한 독한 기운 말이에요. 당연해요. 나라도 그럴 거예요.” 목소리는 시든 나뭇잎만큼이나 기운이 없었다.


“……” A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서 있었다. 맥박은 더욱 빨라졌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느낌마저 들었다.


“놀라셨죠? 걱정 말아요. 오늘 밤이 지나면 해결될 거예요. 아침이 되기 전에 이파리를 모두 떨굴 거거든요. 아쉽지만 올해 한 살이는 이걸로 끝내려고 해요. 은행도 포기해야겠죠. 그래도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무성한 나뭇잎을 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가을에는 은행도 열릴 거랍니다.” 잠시 말을 멈춘 나무는 크게 한숨을 쉬고 천천히 이어 같다.


“오랫동안 이 자리를 지켜 왔는데, 휴!”


700년 동안 전쟁도 몇 번 겪고 여러 차례 불도 났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고 했다. 올해도 봄이 끝날 무렵까지는 아무 일이 없었다. 아니 다른 해 보다 더 순조로웠다. 비는 때맞춰 내렸고, 절기는 조금도 빗나가지 않았다. 풍성하고 만족스런 여름을 맞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비오는 밤이었다. 나뭇잎 하나가 바로 옆에 있는 나뭇잎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득 자기와 다르게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는 별 생각 없이 한마디 던졌다. “너는 생긴 게 왜 그래? 잎맥이 고르지 못하고 색깔도 나보다 진하잖아.” 그 말이 신호였다. 나뭇잎들은 서로를 훑어보았다. 하나가 둘로, 둘은 넷으로, 넷은 열여섯으로 …… 순식간이었다. 십일만일천삼백십구개의 나뭇잎 모두가 같은 나무에 붙어 있는 십일만일천삼백십팔개의 나뭇잎이 자기와 다르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비교는 반목으로 바뀌었고, 급기야는 서로를 혐오하게 되었다. 나무 전체가 독기에 감염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기운은 점점 독해졌다. 보름이 지난 오늘 밤, 나무는 자기 몸에 퍼진 독기를 그대로 두었다가는 자신도 위험해지겠다고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끝내야 했다. 날이 밝기 전에 이파리를 모두 잘라 낼 참이었다. 그리고 자기에게 닥친 일을 누군가에게 꼭 말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참에 A가 나타난 거라고 했다.


믿기지 않았다. 나뭇잎이 서로를 비교하고, 다르게 생겼다고 비난하다니. 세상에 똑같은 나뭇잎이 어디 있단 말인가? 대충 비슷하게 보일 뿐 모두 다르게 생겼는데, 그걸 이유로 욕을 하고 독기를 뿜어낸다면, 700년 세월도, 아름드리 굵기도 소용이 없을 게 분명했다. 견디지 못할 거였다. 제 몸에 붙어 있는 모든 나뭇잎을 제 손으로 떨궈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이야기를 마친 나무는 마침내 결심을 한 듯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첫 번째 은행잎이 떨어졌다. 한 밤의 이슬과 독기에 젖은 이파리는 맥없이 주저앉았다. 나풀거림도 흩날림도 없었다. 이윽고 모든 잎이 쏟아졌다. 바닥은 순식간에 은행잎으로 뒤덮였고,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던 A 역시 십일만일천삼백십구개의 은행잎에 파묻혔다. 나뭇잎마다 남아 있던 독기가 고스란히 덮치자 A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발버둥을 쳐도 빠져 나올 수 없었고, 소리를 질러보아도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잠이 깬 건 숨이 넘어 가기 직전이었다.


온 몸은 땀에 흠뻑 젖어 있었고 K의 말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답답했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으려 애써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잠이 완전히 달아난 A는 스마트폰을 켰다. 증오를 선동하고 갈등을 부추기는 악플을 규제해야 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독기를 멈춰야 한다는 거였다. 새 법안이 발의되었다고 했다. 갈증이 가시지 않았다. 꿈속 은행나무처럼 감염된 나뭇잎을 한꺼번에 떨궈낼 수 없다면, 아니 다른 사람에 대한 무의미한 관심과 맹목적인 비난, 그러니까 역 관종을 멈추지 않는다면 독기가 사라질 수 있을까? 어느새 창밖이 밝아오고 있었다.


* 미아즈마(Miasma) : 그리스어. 가족 구성원이나 이웃에 대한 폭력적 잔학 행위에 내재하는 전염력 있는 독기. 나름의 독립적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범인의 친척, 또는 그냥 우연히 근처에 있었던 전혀 죄 없는 인간에게도 전염될 수 있다. 방사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일단 악행을 저지르면, 그 미아즈마는 범인을 벌하는 것 - 보통 폭력적이고 희생제적인 죽음 - 으로만 없앨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서 복수의 여신들인 3명의 에리니에스는 미아즈마의 제거를 책임지고 죄인을 추적한다.(출처 : 축의 시대. 카렌 암스트롱)


<수많은 나뭇잎이 똑 같기를 바라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나와 다르면 사람들은,,,,>


#세상이똑같은나뭇잎은없다 #미아즈마 #관종유감 #Mias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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