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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Oct 26. 2020

서낭당

1. 바위


옛날 화전 부치던 김씨에겐

딸이 하나 있었어

골짜기 구석구석 곱다고 소문 난 딸이 있었어

산도적같이 생긴 김씨가 어미 없이 키운 고운 딸은

스물이 되자 대처에 나갔다가 이듬해 돌아왔어

닳아빠진 파란색 고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초점 잃은 눈동자로 갓난아이만 들여다보며

골짜기를 따라 난 긴 산길을 타박타박 걸어 돌아왔어

산도적같이 생긴 화전민 김씨에게 돌아왔어


아비가 누구냐고

산도적 같이 생긴 화전민 김씨가 울고불고 소리쳐 물어도

부지깽이로 내리쳐도

갓난아이를 끌어안은 곱디 고운 김씨 딸은 눈물만 흘렸어

갓난아이를 끌어안은 곱디 고운 김씨 딸이

눈물 한방울에 배신을 쏟아냈고

눈물 한줄기에 눈 먼 사랑을 쏟아냈다는 걸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


아비 없는 자식이 어딨어

갓난아이를 안고 산골로 돌아온 고운 딸은

아비 없는 자식 낳았다고 아비에게 구박받던 고운 딸은

산골로 돌아온 지 달포 만에 목을 매 죽었어

서낭당 나무에 목을 매 죽었어

서낭당에서 제일 큰 고로쇠나무에 목을 매 죽은걸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가 발견했어

꼭 쥔 딸의 손을 김씨가 풀었더니

꼬깃한 종이에 오吳자 한글자가 있었어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 딸이 낳은 아비 없는 아들의 아비는 오씨였어

아비 없는 자식이 어딨어


서낭당에서 제일 큰 고로쇠나무 옆 커다란 바위에는

딸이 마을에 돌아올 때 질질 끝고 왔던 닳아빠진 파란색 고무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어

아비 없는 아들을 낳은 고운 딸이

바위에 기어올라가 나무에 목을 매고서 뛰어내렸다고

사람들은 말했어

예전 옥같이 환한 얼굴을 한 잘생긴

지금은 마을을 떠난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가는 곳마다 따라다녔던 청년이 오씨였다고

사람들은 수근거렸어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는 딸을 나무에 매달아 놓은 채

서낭당 바위 앞에서는 넋을 놓은 채 딸을 바라보았고

집에서는 이제 오씨가 된 고운 딸의 아비 없는 아들을 먹이고 씻기고 입혔어

서낭당에서는 김씨 울음소리가 산을 울렸고

집에서는 김씨 웃음소리가 산을 울렸어


이레가 지나 서낭당에서 제일 큰 고로쇠나무에서 딸을 끌어 내린 김씨는

고로쇠나무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에서 딸이 신던 닳아빠진 파란색 고무 슬리퍼를 끌어 내린 김씨는

딸이 낳은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손자를 데리고 마을을 떠났어

딸을 어디에 묻었는지

김씨와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손자가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몰랐어


김씨와 김씨 딸과 김씨 딸의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아들이 마을을 떠난 지 1년이 지난 여름밤

장맛비가 요란했던 그날 밤

굵은 장대비가 하염없이 퍼부어 개울이 넘치고 산길이 끊어진 그날 밤

천둥번개가 우르르 쾅쾅 내리찍던 그날 밤

서낭당에서 제일 큰 고로쇠나무 옆에 있는 커다란 바위는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려고 기어 올라간 바위는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아들을 안고 마을로 돌아올 때 질질 끌고 왔던 닳아빠진 파란색 고무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바위는

천둥에 쥐어박히고 번개 불에 얻어맞아 쪼개졌어

번쩍 우르르 쾅쾅 정통으로 얻어맞고 갈라졌어

바위가 쪼개진 날이

1년전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 죽은 날이란 소문이 돌았어

하지만 아무도 딸이 죽은 날을 알지 못했어


바위가 번갯불에 맞아 깨진 다음부터

사람들은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와

김씨의 고운 딸과

김씨의 고운 딸이 낳은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아들 얘기를 입 밖에 내지 않았어

동네 개는 서낭당과 제일 큰 고로쇠나무와 번갯불에 쪼개진 바위에서는 오줌을 싸지 않았어

올빼미와 부엉이는 딸이 목을 매단 제일 큰 고로쇠나무 옆에 있는 작은 고로쇠나무에서만 둥지를 틀었어


화전 일구던 사람들이 마을을 떠났어

화전 일구던 사람들이 모두 떠나고

화전 일구지 않는 사람들이 마을에 들어왔어

화전 일구지 않는 사람들은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가 살았는지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가 어미 없이 키운 고운 딸이 있었는지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스무 살에 집을 나가 아비 없는 아들을 낳아왔는지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낳은 아비 없는 아들이 오씨 성을 가졌는지

그런 일이 있었는지 그런 일이 없었는지 몰랐어

언제 딸이 죽었는지 언제 바위가 깨졌는지 알지 못했어



2. 고로쇠나무


화전 일구던 사람들이 떠난 뒤

동네 땅을 모두 사들인 장노인 집에 더부살던 오씨가

얼굴이 백옥같던 청년 오씨가

이제는 머리 희끗하게 중늙은 오씨가

헐렁한 바지에 짧딸막한 다리를 집어넣고 동네를 들쑤시던 오씨가

늘 거기 있었던 것 같은 오씨가

어디서 흘러왔는지 아무도 몰랐어

언제 마을에 들어왔는지 아무도 몰랐어


화전 일구던 동네 땅을 모두 사들인 장노인은

이제는 나이 들어 주변을 정리하던 장노인은

개울가 비탈밭을 내주고

더부살던 오씨를 내보냈어


콩 한 쪽 심을 수 없는 개울가 비탈밭을

서낭당 터 옆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갈밭을 갖게 된 오씨는

난생 처음 땅을 갖게 된 오씨는

서낭당에서 제일 큰 고로쇠나무 옆에 있는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려고 기어 올라간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아들을 안고 마을로 돌아올 때 질질 끌고 왔던 닳아빠진 파란색 고무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매달아 죽은지 1년째 되는 날 번개불에 쪼개진 커다란 바위와

번개불에 쪼개진 바위 옆에 있는 쪼개진 바위들과

번개불에 쪼개진 바위 옆에 있는 쪼개지지 않은 바위들을

이제는 오씨 땅이 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탈밭에 밀어 넣어

콩 한 쪽이라도 심을 수 있는 땅으로 만들려고

안달이 났어


화전 일구던 동네 땅을 모두 사들인 장노인이 오래전 딸에게 내준 서낭당 땅을

장노인의 딸이 죽고 물려받은 장노인의 사위는

서낭당 터에 있는 돌을 오씨에게 내주고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 죽은 제일 큰 고로쇠나무와 함께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 죽은 뒤 올빼미와 부엉이가 둥지를 틀던 작은 고로쇠나무와 함께

집터로 만들기로 했어


오씨와 장노인의 사위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비탈밭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서낭당 땅을 손 맞잡고 보고 간 날

오씨가 몰던 자동차는 개울에 쳐박혔어

오씨가 몰던 자동차에 타고 있던 오씨는 다리가 부러졌어

오씨가 몰던 자동차에 타고 있던 오씨는 머리가 깨졌어

서낭당 터에서 아직 돌멩이 하나 꺼내지 않았는데 사고가 났다고

서낭당 터에 손을 대려고만 해도 벌을 받는 거라고

사람들은 수근거렸어


동네 땅을 모두 사들인 장노인 집에 더부살던 오씨는

얼굴이 백옥같던 청년 오씨는

이제는 머리 희끗하게 중늙은 오씨는

대낮에 멀쩡한 개울에 자동차를 쳐박아 다리가 부러진 뒤에도

굴삭기 기사를 만나고

부동산에 전화를 하고

공짜 흙을 받아올 궁리를 멈추지 않았어


그러던 어느 날

장맛비가 요란했던 그날 밤

굵은 장대비가 하염없이 퍼부어 개울이 넘치고 산길이 끊어진 그날 밤

천둥번개가 우르르 쾅쾅 내리찍던 그날 밤

서낭당에서 제일 큰 고로쇠나무 꼭대기에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달아 죽은 고로쇠나무에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아들을 안고 마을로 돌아올 때 질질 끌고 왔던 닳아빠진 파란색 고무 슬리퍼가 가지런히 놓여 있던 바위 옆에 있던 고로쇠나무에

화전 일구던 동네 땅을 모두 사들인 장노인이 오래전 딸에게 내준 서낭당 땅을 장노인의 딸이 죽고 물려받은 장노인의 사위가

서낭당 땅과 함께 팔려고 하던 고로쇠나무에 번개가 내리쳤어

제일 큰 고로쇠나무는 부러졌어


전기가 끊겨 깜깜해진

장맛비가 요란하던

굵은 장대비가 하염없이 퍼부어 개울이 넘치고 산길이 끊어진

천둥번개가 우르르 쾅쾅 내리찍던

태풍이 몰고 온 바람에 골짜기 안 나무들이 큰 소리로 울던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을 매 죽은 고로쇠나무의 목이 댕강 부러진 그날이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목매달아 죽은 날이란 걸 아무도 몰랐어


화전 일구던 사람들이 떠난 뒤

동네 땅을 모두 사들인 장노인 집에 더부살던

얼굴이 백옥같던

이제는 머리 희끗하게 중늙은

헐렁한 바지에 짧딸막한 다리를 집어넣고 동네를 들쑤시던

늘 거기 있었던 것 같은 오씨가

옛날 산도적 같은 화전민 김씨의 고운 딸이 낳은 오씨 성 가진 아비 없는 아들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서낭당 #성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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