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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Mar 22. 2021

힘을 내요 고욤씨!

1. 감나무


감나무를 좋아합니다. 반짝이는 잎사귀는 내 마음에도 반지르르 윤기를 돌게 만듭니다.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보면 그냥 기분이 좋습니다. 높푸른 가을 하늘 아래 단풍 진 잎사귀는 또 어떤가요? 곱고 선명해서 쳐다보는 눈과 마음에도 주황색 물이 듭니다. 


감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추운 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향수나 추억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어려서 가져보지 못한 결핍이 무작정 좋아하는 것으로 바뀌었나 봅니다. 보상심리입니다. 뒷짐 진 늙은 감나무가 뒷마당에 버티고 서 있거나 앞마당 한 귀퉁이에서 너그럽게 품을 내주고 있는 집을 보면 뿌듯하고 부럽고 아쉽고 욕심나고 막 그럽니다. 


시골집을 장만할 때였습니다. 이런 마음이 통했는지 밭에 대봉 두 그루와 단감 댓 그루가 있었습니다. 전 주인께서 십 몇 년 전에 심었는데, 제법 굵직합니다. 기온이 맞지 않아 그동안 결실이 없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날씨는 어쩔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안타깝지만 긴 짱대로 빨간 감을 따는 그림은 살포시 지웠습니다. 그래도 감나무를 가져보는 오랜 소망이 이루어 진 것만 해도 충분히 신났습니다. 감이 달리지 않아도 감나무는 이미 충분히 감나무입니다.


마음을 접었다고는 해도 그냥 내버려두기는 뭣해 조금씩 손을 댔습니다. 굵은 도장지를 잘라 햇빛이 골고루 퍼질 수 있도록 모양을 다듬었습니다. 거름도 듬뿍 주었습니다. 내 수고 덕분인지, 때가 되어서인지는 모르지만 감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만큼 조금씩 달리더니 이제는 제법 양이 많아졌습니다. 대봉으로는 곶감을 만들어 겨우내 주전부리로 삼고, 단감은 주변 분들과 나눌 수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지난해는 상황이 더 좋았습니다. 감꽃이 진 뒤 초여름까지 무더기로 떨어지던 낙과가 몰라보게 줄었습니다. 여름이 한 참 무르익었는데도 나무에는 굵직한 감들이 빼곡했습니다. 봄비와 양간지풍*과 땡볕의 사나운 공격에 맞서 열매를 지켜낼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해진 것 같았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산을 옮긴다(우공이산, 愚公移山)지만 제 경우는 감나무를 옮기진 못했어도 체질을 강골로 바꾼 샘입니다. 뿌듯했습니다. 앞마당 감나무에 주렁주렁 감이 달려 있는 풍경, 어려서부터 바라던 게 진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일은 알 수 없습니다. 폭염이 한 풀 꺾일 무렵 폭풍우가 들이닥쳤습니다. 물이 넘쳐 길이 끊어지고, 성난 바람에 나무가 쓰러졌습니다. 대봉 감나무 하나도 피해를 입었습니다. 밑동에서 기둥이 세 개로 분지되어 자라고 있었는데, 그 중 두 개가 찢어졌습니다. 처음 봤을 때 내 마음도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난 후 넘어진 가지를 치우려는데, 어라 감잎이 모두 싱싱합니다. 감들도 떨어지지 않고 잘 버티고 있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을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습니다. 아, 가을이 되어도 부러진 나무는 잎과 열매를 지켜 냈습니다. 길게 드러누운 나무에서 맨 손으로 감을 땄습니다. 감사한 마음이 두 배로 들었습니다. 


강풍에 쓰러진 감나무 가지는 그렇게 마지막 감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쓰러지지 않은 나머지 한 개의 기둥이 계속 버텨 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가지가 찢어져 나가면서 속살이 다 드러난 데다 지난 겨우내 워낙 추웠습니다. 살아난다 해도 예전만 못할게 뻔합니다. 대봉은 하나만 남았다고 생각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마음이 아픕니다. 


* 양간지풍 : 강원도 양양과 간성 사이에 부는 국지적 강풍으로, 고온 건조하고 속도가 빠른 특성이 있어 강원도 지역 산불이 크게 번지는 원인 중의 하나(네이버 지식백과)


2. 고욤


감나무는 추운 곳을 싫어하지만 사촌뻘인 고욤은 추위를 상관하지 않습니다. 감나무의 북방 한계선 위쪽에서도 잘 자랍니다. 고향 뒷산에도 고욤나무가 있었습니다. 감처럼 생겼지만 훨씬 작은 열매가 닥지닥지 열립니다. 콩알보다 조금 큽니다. 가을 되면 주황색으로 물드는데 꽤나 먹음직스럽습니다. 하지만 색깔에 속으면 낭패입니다. 겨울이 되기 전 고욤은 입이 쩍쩍 들러붙을 정도로 떫습니다. 그러다가 눈과 추위에 충분히 숙성되고 나면 까맣게 색이 바뀝니다. 그 즈음이 되어야 먹을 만합니다. 개구지게 산을 헤매고 다니다 고욤나무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습니다. 한주먹씩 따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먹었습니다. 맛보다는 심심풀이 삼아 물고 다녔습니다. 


시골집 옆으로 흐르는 개울가에 고욤나무가 있습니다. 어려서 기억이 떠올라 반갑지만 그저 쳐다보기만 합니다. 우선 먹을 게 없습니다. 작은 열매에 씨만 잔뜩 입니다. 과육은 껍질에 조금만 붙어 있습니다. 애써 씨를 발라내는 수고에 비하면 밑지는 장사가 분명합니다. 연한 단맛 끝에 묻어나는 떫은맛도 손 가는 걸 꺼리게 만듭니다. 혹독한 겨울이 지난 뒤에도 떫은맛은 끝내 가시지 않습니다.

 

그림에 떡처럼 쳐다만 보게 된 이유가 또 있습니다. 겨우내 고욤나무를 참새 방앗간처럼 드나드는 새가 있습니다. 직박구리입니다. 나에겐 보잘 것 없지만 녀석에겐 요긴한 식량입니다. 세상이 눈에 덮여 도저히 먹이 활동을 할 수 없을 때에도 찜 해둔 고욤나무 하나만 있으면 든든합니다, 아직 먹잇감이 부족한 봄날에도 고욤나무는 항상 그 자리를 지킵니다. 고욤 역시 직박구리의 먹이활동과 배설을 통해 자손을 퍼트립니다. 둘의 아름다운 상생 관계를 알고 난 후로 더는 고욤을 탐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에 고욤 몇 개를 땄습니다. 하나를 입에 넣고 우물거려봅니다. 역시나 떫습니다. 갑자기 직박구리의 비상식량을 뺏은 건 감나무를 접목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고욤나무에 감나무 가지를 접붙이면 감나무를 복제할 수 있습니다. 쓰러진 감나무를 생각하며 고욤 씨를 모종용 트레이에 심었습니다. 하나 둘 흙을 뚫고 나오는 데 몹시 힘들어 보입니다. 고리처럼 줄기를 먼저 내민 채 용을 씁니다. 떡잎은 며칠 지나야 땅에서 빠져 나옵니다. 그동안 허리를 잔뜩 구부린 모양인데 보는 내내 안쓰럽습니다. 떡잎이 나와도 애잔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풀인지 나무인지 분간이 되지 않습니다. 이 가녀린 녀석이 앞마당과 뒤뜰을 지키는 고목이 된다는 게 믿기지 않습니다. 


내 걱정이나 의심과는 아무 상관없이 고욤 씨는 고욤나무로, 고욤나무는 감나무로 잘 자랐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면 우선 고욤 씨께서 힘을 내셔야 합니다. 아침저녁 들여다보며 응원 합니다. 


힘을 내요, 고욤씨! 

힘을 내셔야 합니다, 고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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