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불여졸성(狡詐不如拙誠)
친구는 눈이 깊었습니다. 미간을 찡그릴 때면 더 그윽해지곤 했습니다. 예술가 기질은 눈매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심심풀이로 상반신 자화상을 그린 적이 있는데 그림 속 진한 눈썹과 개구진 눈동자는 삼십 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 속에 뚜렷하게 남아있습니다. 아는 사람의 부탁으로 캔버스에 그린 찰리 채플린 전신상은 어느 카페 입구에서 꽤 오랫동안 간판 노릇을 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했다는데 헤비메탈을 특히 좋아했습니다.
친구에게는 여자가 많이 따랐습니다. 또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서부터 예닐곱 살 위에 이르기까지 연령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학생, 직공, 백수 등 직업군도 다 달랐습니다. 같이 어울릴 때 보면, 친구는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데, 여자들 쪽에서 호감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애정의 정도로 보면 친구는 언제나 Super 甲이었습니다.
다정다감과는 거리가 멀뿐더러 권위적이고, 가끔 ‘버럭’하며 성질도 내는 사람을 여자들은 왜 좋아할까 궁금했습니다. 겪어보니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데면데면한 겉모습과 달리 그는 여자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여자라고 했지만 모든 사람에게 그랬습니다. 거친 언사로 위장했어도 속마음은 부드러웠고, 호소력 짙은 눈길을 통해 따뜻한 속정이 전달되면 사람들은 경계를 풀고 빗장을 열었습니다. 살아 온 궤적이 꽤 달랐음에도 나 역시 그 눈에 매료되어 한동안 같이 살았습니다.
친구는 졸성(拙誠)*이었습니다. 투박한 행동에 정제되지 않은 어휘를 썼지만 사람을 끄는 눈빛은 진실했습니다. 수지타산을 계산하는 그를 본 적이 없습니다. 때때로 주먹질을 했는데 치사하고 비겁한 걸 참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중요한 건 사람이었고,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진심은 언제나 통했습니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들도 밤새 그의 얼굴만 쳐다봤습니다. 관심을 끌려고 애써 봤자 머릿속에서 이런저런 계산이 분주했던 나는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 졸성(拙誠) : 졸렬하고 어설픈 진실 혹은 진심
속임수는 '남을 꾀어서 속이는 행위 또는 그 수단'(다음 어학사전)입니다. 속일 때는 거짓말이 동원됩니다. Philip Roth는 소설 『Everyman』에서 거짓말을 하는 이유를 설명합니다. “거짓말은 정말 경멸스러운 방식으로 값싸게 다른 사람을 통제하려는 거야. 다른 사람이 불완전한 정보에 따라 행동하는 걸 지켜보는 거야.” 누군가를 내 의도대로 행동하게 하는 것, 꼭두각시로 만드는 게 거짓말이고 속임수입니다.
한발 더 나아가 거짓과 술수는 상대를 자기 의도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합니다. 상대가 나보다 못하다는 전제가 없으면 남을 속이려는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Everyman』에서 인용한 말은 바람피운 남편에게 아내가 퍼붓는 말입니다. 분노는 남편의 외도에 숨겨진 ‘통제’와 ‘우월’ 코드를 겨냥합니다. 성숙하고 동등한 인격주체가 함께 살아간다는, 동반자라는 믿음이 배반당했습니다.
부부 사이만 그런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속았을 때 화가 나는 건 상대가 나를 얕잡아 봤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거짓말한 아이를 참지 못하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속임수가 난무하는 노름판에서조차 밑장을 빼다 걸리면 손모가지를 내놓아야 합니다.
어설퍼서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없는 사실을 만들고, 있는 사실을 왜곡하려다 보니 속임수는 번지르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듯해 보이려고 갖은 수를 씁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속임수는 교묘합니다(狡詐). 소설 속 주인공 역시 불륜 상대와 정사 여행을 떠나기 위해 휴가 일정과 장소를 치밀하게 짜 맞춰야 했습니다.
주머니 속에 넣어둔 송곳을 감추는 건 불가능합니다. 단기간이라면 몰라도 속임수는 들통나기 마련입니다. 아무리 정교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이 밝혀지는 순간 관계는 파탄 납니다. 소설에서 남자의 외도는 결국 발각되었고, 아내는 바람난 남편에게 이혼이라는 철퇴를 내리쳤습니다. 훗날 죽음을 맞이할 때, 남자는 혼자였습니다.
상대방을 통제하는 또 다른 방법은 폭행입니다. 거짓말로 조종하는 게 속임수라면 폭행은 힘으로 윽박지릅니다. 미워서 때리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폭력은 상대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기 위해서 행사됩니다. 힘을 앞세워 돈을 빼앗거나 이권에 개입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동원하는 수단이 거짓말이냐 완력이냐 에서 갈릴 뿐 속임수와 폭행은 구조가 같습니다. 둘 다 상대방을 통제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되고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사기꾼과 폭력 행위자의 머릿속에는 나는 우월하고 상대는 저열하다는 도식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마음이 통했다면 사술이나 폭력은 필요 없습니다. 마음을 얻지 못한 사람이 욕심만 채우려다 보니 사달이 납니다. 상대는 더 이상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고 내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합니다. 객체가 되어버린 피해자가 경제적으로 손해를 보거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 외에 정서적으로 충격을 받는 건 그래서입니다. 자신이 ‘작업대상’이 되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성폭행은 인간성에 대한 극단적인 공격입니다.
물리력을 동원해 가해자는 삐뚤어진 성적 욕망을 해소합니다. 하지만 성폭행 피해는 자존감과 인격 전부에 미칩니다. 그래서 악랄합니다. 물리력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권한을 동원한다는 점에서 MeToo에서 드러나는 권력형 성범죄는 더 악질입니다. 자신의 보호와 지시를 받는 피해자가 저항조차 할 수 없다는 걸 악용합니다. 무력한 피해자를 앞에 두고 신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철저하게 비겁합니다.
거짓과 폭행은 상대를 도구로 본다는 점에서 모두 誠의 대척점에 서 있습니다. 도구로 본다는 건 대상화시킨다는 뜻입니다. 대상화된 상대는 본래의 의미와 맥락을 잃어버리고 파편화된 부분으로 전락합니다. ‘성적 대상화’에서는 성욕을 해소하는 수단이 되고, ‘노동의 대상화’에서는 노동력을 뽑아내야 하는 수단일 뿐입니다. 대상화된 자연은 개발과 착취의 대상입니다. 대상화의 결과, 인격은 파탄 나고 자연은 파괴됩니다.
진실한 사람은 상대를 도구로 보지 않습니다. 인간 자체로 봅니다. 앞서 졸성(拙誠)한 친구에게서 보듯 거칠고 투박한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중요한 건 상대를 바라보는 눈입니다. 진심이 담긴 눈빛은 마음의 문을 열게 합니다.
그는 그의 인생을 살고 나는 내 인생을 살되 각자의 삶을 존중하는 게 출발점입니다. 인정과 합의는 서로를 밀착시키고, 진심은 윤활유가 되어 둘 사이를 부드럽게 합니다. 부드러운 밀착이 반복되면 도타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비즈니스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영업의 달인은 얄팍한 언변이 아니라 진심을 장착하고 고객을 만납니다.
‘교사불여졸성(狡詐不如拙誠)’은 한비자(韓非子)가 진심과 속임수의 관계에 대해 남긴 말입니다. 한비자는 권모술수의 대가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그가 기름기 줄줄 흐르는 속임수보다 투박한 진실을 높게 평가했다니 의외입니다. 한비자는 뛰어난 학문에도 불구하고 초라한 말솜씨 때문에 진시황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동문수학한 이사(李斯)의 시기와 질투에 찬 혀 놀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狡詐不如拙誠은 그의 진심이 담긴 유일한 문장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내가 쓰는 말의 총합입니다. 오늘 쓰는 말과 머릿속을 떠도는 생각을 들여다보면 내가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묘한 말장난과 언어폭력으로 상대를 수단화하는 건 아닌지 늘 살펴야겠습니다. 狡詐不如拙誠에서 보듯 교사한 것보다는 졸성한 게 훨씬 남는 장사입니다.
* 狡詐不如拙誠 : 교묘한 속임수는 졸렬한 진실만 못하다(韓非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