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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연 Oct 08. 2020

알탕의 추억

아들의 미소

1. 삼행시


몇 년 전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삼행시를 공모했습니다. 제시어는 태백산. 국립공원 지정 1주년을 기념하는 이벤트입니다. 어린 시절 “당골 광장”을 앞마당 삼아 놀았던 사람으로서 동참하는 게 도리, 용감하게 도전했습니다. 며칠 뒤 당첨자가 발표되었고 다시 얼마 후 국립공원 “랜덤”박스가 도착했습니다.


반달곰 물통에 반달곰 조립키트, 월출산 로고가 박힌 산행수첩 그리고 청와대 손수건이 들어있습니다. 태백산과 전혀 관계없는, 하지만 랜덤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다이나믹한 구성에 감탄하며 난생 처음 “공모전” 당선 기쁨을 만끽했습니다. 경향각지 축제판 마다 벌어지는 삼행시 대전에 용기백배 도배질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다시 읽어보니 민망합니다. 사심 가득한 삼행시 도전은 이제 그만!


<국립공원 랜덤박스> 하나같이 태백산과는 거리가 멉니다.


<태백산>


(태) 태초에 사람 나고 산 솟아나니

(백) 백두의 한 가운데 그곳이 태백이라!

(산) 산그림자 그윽한데 반도의 얼이 서렸구나


#태백산#국립공원#나_태백출신


* 마지막 해시테그 때문에 붙여 준거라면 더 낭패


2. 1985년 여름


당골 광장을 주름 잡던 시절은 내 인생 황금기였습니다. 4계절 내내 진종일 산과 들을 쏘다녔고 개울에서 물고기 잡는 걸 최고의 낙으로 알았습니다. 칡과 다래넝쿨을 엮은 아지트에서 낮잠을 자기도 했고, 모닥불에 물고기를 구워먹으며 하루를 마감했습니다. 이른 저녁, 골짜기를 따라 길게 드리워진 산등성이를 넘어가는 해는 언제나 아쉬움을 남기곤 했습니다.



지금은 국립공원이지만 태백산이 아직 도립공원도 아닌, 그러니까, 온전히 동네 뒷산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골짜기 아무데서나 불을 피워 돼지고기를 구워먹었습니다. 개울에 널려 있는 넓적한 돌판에 구웠기 때문에 ‘돌구이’라 불렀는데 먹어본 사람 누구든 최고로 쳤습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따라 다니며 자연스럽게 스킬을 배우다가 중학교 졸업 즈음이면 대부분 ‘돌구이’ 독립을 했습니다. 더 이상 어른들 틈에 끼지 않고 또래끼리 어울려 다니며 고기를 구웠는데, 어른이 되어가는 의식으로 여겼습니다.


1985년 여름도 그런 날 중 하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인 우리 넷은 돼지고기, 수박 한 덩이, 사이다 몇 병, 고추와 상추 따위를 챙겨 집을 나섰습니다. 목적지는 태백산 골짜기. 당골 광장에서 시작된 계곡길이 가파르게 반제로 치고 올라가기 직전 어디쯤이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불을 지펴 돌구이를 했습니다. 피서를 겸해 모처럼 만난 회포를 풀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더위는 먼 나라 얘기인 산골에서도 한여름 ‘피서’는 중요한 연례 행사였습니다.




그날 알탕을 했습니다. 산길 바로 옆, 깊지 않은 계곡인데 고등학생 넷이 팬티 마저 홀랑 벗고 물에서 놀았습니다. 첨범거리다 추우면 불 쬐고, 물싸움하다 지치면 고기 먹고, 이도저도 아니면 술을 마셨습니다. 그게 32년 전 여름입니다. 사진이 남아있어서인지, 네 사람 모두 그날을 또렷하게 기억합니다.


* 태백산 도립공원은 1989년, 국립공원은 2016년


3. 2017년 여름


살면서 더 이상 알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휴가철이면 골짜기마다 사람이 넘쳐나는데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합니다. 알탕은 돌이킬 수 없는 향수요 유년을 추억케하는 징검다리일 뿐이었습니다. 1985년 여름에 찍은 사진은 그렇게 화석이 되어 갔습니다.


2017년 여름, 산속에서 며칠을 보냈습니다. 같이 머물던 가족들이 떠나고 나니 오롯이 혼자가 되었습니다. 인공적인 소음은 내 몸에서 나는 소리가 전부입니다. 사람은 그림자도 없었을 뿐더러 SNS를 쓰다보니 말을 할 일도 들을 일도 없습니다. 적막한 무인지경, 밤에는 별빛이 흘러내렸고, 낮에는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만 가득합니다.


그곳에 작은 계곡이 있었습니다. 아래로 향하던 물길이 큰 바위에 기대어 맞춤한 웅덩이를 만들었습니다. 옷을 벗고 조심스럽게 들어갑니다. 발끝에서부터 시작한 찬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쭈뼛쭈뼛 머리끝까지 올라옵니다. 물은 배꼽에서 멈췄습니다. 숨을 들이 키고 힘을 뺀 채 물 위에 엎드립니다. 태초로 돌아간 하얀 몸뚱아리가 둥둥 뜹니다.


고요한 물 속 세상이 열립니다. 거친 속 물살이 만들어 낸 거품 속에서 물고기가 놀고 있습니다. 부드러운 그 몸짓을 따라가다 그해 여름, 태백산 골짜기의 나를 만났습니다. 앳된 소년이 물안경 너머에서 고기를 굽고 물장구를 칩니다. 친구들 웃음소리와 맨살이 닿는 감촉, 너울대는 모닥불과 연기, 나뭇잎을 뚫고 겨우 바닥에 내려앉은 햇살 몇 조각, 투박한 사이다 병과 칼칼한 소주 맛이 차례로 떠오릅니다. 자맥질 한번 길이 밖에 안 되는 작은 웅덩이는 박제가 된 추억을 소환하는 마법의 문이었습니다.


끈적한 땀은 어느새 씻겨나고 솜털 뽀송한 팔뚝엔 그해 여름처럼 닭살이 돋았습니다.


<토끼바위> 바위아래 작은 웅덩이는 30년 세월을 이어주는 징검다리가 되었습니다.


4. 2017년 고등학교 2학년


1985년의 내가 그랬듯 큰아들은 고2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30년 전 나를 만나던 날 아들은 남태평양 작은 나라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2017년 여름은 어떻게 기억될까요?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아들은 한결 편해져 있었습니다. 흔들리는 시선 대신 환한 미소를 선물로 들고 나타났습니다. 32년 전의 고등학교 2학년과 지금의 고등학교 2학년을 번갈아 봅니다. 새삼 그의 앞에 펼쳐진 여백이 무겁습니다. 자아는 여물지 않았는데 세상은 빠르고 안개 낀 앞날은 흐릿합니다. 고기 굽고 물장구치던 시절이 그에겐 없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빚진 마음으로 아들이 앞으로 선택할 미래를 응원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임도 알겠습니다.


아들은 어려서 영화 “박물관은 살아있다”를 유난히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그에게 2017년 여름이 빛나는 화석으로 살아 돌아올 것을 믿습니다. 그래서 내가 물속에서 건져 낸 사진처럼 과거를 추억하고 오늘을 채워내며 내일을 희망하는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태백산 #국립공원 #알탕 #돌구이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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