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테면 두 달 안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서 가기로 한 것이다.
매일 8km를 가야 하는데 오늘 이런저런 사정에 6km밖에 걷지 못했다면 내일은 10km를 뛰어야 한다.
이 가정에서는 세 가지 조건이 관여를 하고 있다.
두 달이라는 시간,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 걷기라는 방법.
이 중 하나의 조건만 달리해도 좀 더 편하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만이 중요할 때에 고려해 볼 수 있는 사항이고,
부산을 가는 것뿐만 아니라 부산까지 '어떻게' 가는지가 중요하다면, 그래서 선택한 세 가지 조건이라면 모두 포기할 수 없다. 함께 유지한 채로 무사히 도착하기를 궁리해야 한다.
내가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업에 비유를 들어 본 것이다.
한 장 한 장 그림을 쌓아서 만드는 애니메이션 작업이라는 것이 그렇다.
오늘 못 그린 프레임은 내일의 부채가 되어 야금야금 쌓이다 마감에 임박해서는 해일처럼 덮치기 일쑤다.
그 사단을 막기 위해서는 매일 성실하게 정해진 분량을 쳐 나가는 것만이 답인데
기계가 아닌 유기체의 몸을 가진 사람이 그러기가 참 쉽지 않다.
어떤 날은 몸의 사정이 어떤 날은 마음의 문제가 또 어떤 날은 관계의 사건들이 생긴다.
작업 기간이 길수록 그 변수들은 정말 다양하고 다채롭게 일어나고
변수에 대한 대응은 변수가 일어나기 전까지는 할 수 없다.
그래서 다년간 다양하게 망해본 경험 덕에 체득한 결론은 시간이라도 넉넉하게 빼 두자는 것이었다.
변수가 일어나고 대응책을 마련하고 해결하는 과정까지를 작업 기간에 포함시키는 것.
그래서 마감이 12달이라면 10달이 기한인 것처럼 작업을 해야 그나마 안전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데
이번 지원 사업은 제작 기간이 10달이라 것이 또 변수였다.
8달 안에 8분짜리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본 적은 없어서 벌써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왜 하루가 24시간인지 일주일은 7일이고 한 달은 31일밖에 안 되는지
죄 없는 달력만 뚫어져라 쳐다보다
부디 남은 날들 무사히 헤쳐나갈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