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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곱셈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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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Feb 19. 2017

아버지, 저는 그냥
‘허병민’으로 살겠습니다

저는 제가 제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햇수로 9년 전에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몇 년 간 혼자 살던 저는 2008년 겨울, 

도저히 더 이상은 힘들어서 안 될 것 같아 

부모님 댁으로 들어오게 됐지요.

솔직히 그때 정말로 들어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워낙 예민하고 엄격한 데다 

한 ‘보수’ 하시는 분이라 고민스러웠지요. 

애초에 집을 나갔던 것도 

아버지와 크게 싸우고 

사이가 안 좋은 상태에서 나간 거라, 

다시 들어오기 위해선 

어떤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제가 ‘왜 들어와야 하는지’에 대해 

정식으로 보고(?)를 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설렁설렁 ‘대충 까이꺼’ 

넘어가는 분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거실에 앉아서 긴장된 자세로 

발표를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께서 먼저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동안 혼자서 고생 많이 했지? 

잘 들어왔다. 

앞으로 이 집에서 같이 잘 지내보자.” 


제 귀를 의심했습니다. 

‘이건 또 뭐야. 갑자기 왜 이런, 

전혀 아버지답지 않은 

느끼한 멘트를 날리시는 거지?’ 

그런데 저녁 식사를 하면서, 

또 식후 과일을 깎아먹는 내내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돼 

‘아, 그 사이 아버지도 많이 바뀌셨구나.’라고 

마음을 먹게 됐지요. 


그러나 역시, 

‘혹시나’는 ‘역시나’였습니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더군요.

다음날 오전 7시 5분경에 

일이 터지고야 말았습니다.


아버지께서 제 방문을 확 걷어차시더니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저를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어제 잊어버리고 얘기 안 한 게 하나 있다. 

여기에서 같이 사는 건 좋다. 

대신 오전 7시에 일어나 세수하고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해야 한다. 

그 후 다시 자든 뭘 하든, 

알아서 하렴.” 


오 마이 갓.


참고로 저는 올빼미 라이프의 선두주자입니다. 

밖에서 혼자 지내는 동안 

낮과 밤이 완전히 뒤바뀐 생활을 해온 저입니다. 

오전 5시와 7시 사이에 잠자리에 들어

이른 오후에 일어나는, 

나름 규칙적인(?) 생활을 해왔지요. 

그런 저보고 이제부터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해 식사를 하라고 하다니, 

지옥도 이런 생지옥이 없습니다. 


희미하게 일그러져가는 제 얼굴을 보시곤

암담해하는 제 마음을 간파하셨는지, 

아버지께서 슬쩍 책 한 권을 

저에게 건네시더군요. 

“안다. 네가 밖에서 혼자 살면서 

낮과 밤이 바뀌었을 거라는 걸. 

그래서 너를 위해 책 한 권 준비했다. 

준비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이 책을 갖고 한 달 동안 한번 연습해봐.” 

 


태어나서 처음으로 읽어본 자기계발서가

바로 아버지께서 권해주신 이 책입니다. 

제목, 『아침형 인간』. 

네. 정말 죽도록 열심히, 줄까지 쳐가며 

책에 나와 있는 대로 한번 실천해봤습니다. 


결과가 어땠을까요? 

저는 책의 제목처럼, 

한 달 후 아침형 인간이 되어 있었을까요?


말도 안 되는 헛소리이지요. 

책의 힘을 무시하는 거야 아니지만,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이었다면 

굳이 이런 책을 읽지 않더라도 

저는 이미 그렇게 되어 있었을 겁니다. 


오전 7시 기상? 

네, 보기 좋게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한 달 내내.

그럼 그것을 아버지가 그냥 보고만 있었느냐?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지요.

참고로 아버지는 

포기란 단어를 모르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버지께서 이번에도 저를 부르시더니 

책을 또 한 권 건네주시더군요.

친절하게도 이런 말을 곁들여서 말입니다.

“갑자기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니 많이 힘들지? 

그래서 책 한 권 더 준비해봤다. 

이 책이라면 좀 더 도움이 될 거야.”



『새벽형 인간』. 

제목이 아주 무시무시합니다. 

공포심이 순식간에 몰려오더군요.

띠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습니다. 

‘새벽 4시 기상, 만사형통!’ 

그것도 모자라 프롤로그에는 

또 이런 말이 적혀 있더군요.

‘아침 4시에 일어나면 인생이 변한다.’

그야말로 우리 모두

정주영 회장이 되자는 거지요. 


실현가능성이 무척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아버지께서 

권하시는 책이니 어쩌겠습니까. 

까라면 까야지요. 

‘뺑이 치는’ 기분이 역력했지만, 

속는 셈 치고 다시 한 번 

한 달 간 열공의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그 결과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번엔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일어나긴 개뿔. 

아무 일도,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두 달이라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할 수 있는 시간. 

그제야 제 머릿속에 

작은 깨달음이 하나 찾아오더군요. 


물론 당시 속으로는 

완전히 얼어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버지께 가서 나름 당당하게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아버지. 7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 일어나겠습니다. 

아버지께서 바라시는 대로 

저는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일찍 일어나면 

하루 종일 어질어질하고 집중력이 떨어집니다. 

사람마다 취침 시간이며 기상 시간,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이 다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하루 내내 비몽사몽하느니

새벽에 열심히 할 일 하고 

늦게, 푹 자는 쪽을 택하겠습니다. 

앞으로 조금씩 바꿔보도록 노력은 하겠지만, 

저의 이런 모습 자체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셨으면 합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저지른 ‘반항’이었습니다.

‘에라이, 모르겠다. 이판사판이여!’ 

이런 심정으로 내지르긴 했지만,

솔직히 오금이 저리더군요.


그 이후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아버지께 박살나면서 집에서 쫓겨났을까요.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지요.

그 이후 독립하기 전까지 

아버지와 아무 탈 없이 ‘잘 지냈’습니다. 

물론 올빼미인 채로요. 


저는 9년 전, 그때 그런 말을 하면서 

가슴 깊이 느낀 게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나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제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처음으로 돌아보게 된 겁니다. 


저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무지막지하게 괴로워하는 

대표적인 올빼미였습니다.

절대 아침형 인간이 될 수 없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것을 인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라는 무서운 존재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갖고 있는 

‘일찍 일어나는 사람’, 

‘늦게 일어나는 사람’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지요. 

사실 저는 제가 

제 자신에 대해 갖고 있는 생각보다는 

남이 갖고 있는 나에 대한 생각, 

내가 가져야 할 것만 같은 생각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있었던 겁니다. 


여러분 중 혹시 자기계발서를 

지금까지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는 분 계신가요. 

모르긴 몰라도 최소한 한 두 권 정도는, 

빠삭하게까지는 아니더라도 

대충 훑어보기라도 했을 겁니다. 

시중에 좋은 베스트셀러들도 많이 나와 있지요. 

이름만 들어도 빵빵한 저자들의 책,

한 번쯤은 살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그 책들을 보면서 

‘실제로’ 변화를 경험해보신 분 계신가요. 

혹시 이 책을 봤다가 저 책을 봤다가 하는 등 

작심삼일, 갈팡질팡하면서 

바뀌는 건 거의 아무것도 없지 않던가요.

‘오호, 그래.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거군. 맞는 말이네.’ 

‘이렇게 하면 될 거야. 나도 해봐야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막상 실전에 돌입해보면 

쉽게, 뜻대로 잘 안 되지 않던가요.    


대체 왜 그런 걸까요. 


그 이유는 생각 외로 간단한 곳에 있습니다. 

우리는 ‘김난도’가, ‘박경철’이, 

‘혜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성격과 성향을 토대로, 

자신이 처한 고유한 환경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과 생각으로 살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리는 이런 

소위 ‘대단한’ 분들의 책을 읽을 때

무슨 최면에 걸리기라도 한 양, 

자신의 성격과 성향, 

자신이 처해 있는 환경, 

자신의 방식과 생각을 

무의식적으로 제거해버립니다. 

‘나’라는 존재를 희석시킨 채 

공감을 하는 (척하는) 것이 

그 공감이 오래 갈 수가 없는,

변화가 생길 수 없는 이유이지요.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쳇바퀴 돌 듯 이 책, 저 책 

계속 돌고 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곱든 밉든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몇 년 전, 서점에서 

이런 제목의 책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지적으로 나이 드는 법』. 

띠지 문구도 아주 폼 나더군요. 

‘죽는 그날까지 품격 있게 살고 싶다.’ 

저는 이 책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서 바로 사버렸습니다. 

책 제목에 혹해서가 아닙니다. 

띠지에 적혀 있는 문구가 

그럴 듯해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엉뚱하게도 

책 속의 목차에 적혀 있던 

단 한 줄의 제목 때문입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길러라.


고백하건대 이 책,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제목을 보자마자 

책을 읽어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책에서 얻을 것을 

이미 이 한 줄에서 

다 얻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단 걸까요. 

그것도 지극히 ‘비사회적’이고 

‘비모범적’인 제목을 말입니다. 

그가 실제로 어떤 의도를 갖고 

이런 제목을 달았는지, 

책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제목을 보면서 새삼스럽지만 

스스로 다시 한번 절감한 게 있다면, 

그것은 사람들이 

누구나 할 법 하고 

할 것 같은 일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무의식적으로 하기보다는 

내가 진심으로 하고 싶고, 

했으면 하는 일을 

나만의 주관을 갖고

의식적으로 하는 것이 맞다는 것

그거야말로 정말로 

나답게, 나처럼 사는 거라는 것. 


어쩌면 진짜 ‘지적으로 나이 드는 법’은 

거기에서 자연스럽게 

찾아지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곱셈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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