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곱셈 인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허병민 May 11. 2017

당신은 지금,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는가

故 정은임 아나운서를 기억하며

단 한 사람의 가슴도   

제대로 지피지 못했으면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내 마음의 군불이여

꺼지려면 아직 멀었느냐


안녕하세요. FM 영화음악의 정은임입니다.


나희덕 시인의 「서시」로

FM 영화음악 문을 열었는데요.  

서시, 우리말로 여는 시입니다.

음,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해서 시를 쓸 사람이

영원한 시작의 의미로 쓴 글이죠.


항상 아이러니해요.

이렇게 끝 방송을 하게 되면

그래, ‘끝은 시작과 맞닿아 있다’ 하는 의미에서

이런 시를 골랐어요. 꼭 그 마음입니다.


단 한사람의 가슴도

따뜻하게 지펴주지 못하고

그냥 연기만 피우지 않았나.


자, FM 영화음악 듣고 계신

모든 분들을 위해서

오늘 첫 곡 들려드리겠습니다.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2004년 4월 26일 방송분에서

(방송은 www.podbbang.com/ch/1813에 수록되어 있는 파일을 통해 다시 들을 수 있습니다.)


MBC의 전도유망했던 아나운서, 정은임.

이분은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2004년 8월 4일에 세상을 떠났지요.


여러분께 들려드린 이 방송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인,

사망하기 4개월 전에 진행했던

그녀의 마지막 방송입니다.


두터운 마니아층을 거느렸던 「정은임의 FM 영화음악」,

기억하시는 분들 꽤 많지요?

이 프로그램은 당시 많은 젊은 영화팬들을

청취자로 끌어들이며  

거의 ‘컬트’에 가까울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프로그램입니다.

다 은은한 목소리와  

해박한 영화지식을 갖고 있었던

정은임씨 때문이었지요.



그런 그녀가 마지막 방송을 진행한지 3개월 만에

한강대교 남단 흑석동 삼거리에서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고,

큰 수술을 받았지만  

끝내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고작 서른일곱이었지요.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녀의 빈소를 찾아갔던 기억이,

영정 속에서 활짝 웃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말입니다.


정은임씨의 사진을 보면서,

FM 영화음악의 골수팬으로서

사망하기 4개월 전에 그녀가 진행한

마지막 방송을 떠올렸던 기억이 납니다.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정든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 있는 목소리로

항상 그래왔듯,

차분하게 방송을 마무리했지요.


저는 장례식장을 걸어 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정은임씨는 예상을 했을까,

마지막 방송을 진행하고

4개월 뒤에 사망할 거란 사실을.

예상이나 했을까, 그날의 교통사고를.‘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겠지요.


우리는 자신에게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우리 모두 그저,

평범한 일간일 뿐이니까요.

한 시간 뒤에,

일주일 뒤에,

일 개월 뒤에,

일 년 뒤에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미래를

우리가 스스로 예상하고 컨트롤할 수 없다면,

지금의 자리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딱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는 것.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는가.


자기 자신에게 확인해보는 것.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주변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지펴주고 있는가.


혹시 놓친 가슴은 없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 것.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커지듯

이러한 생각에도 조금은

깊이가 생겨나는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그것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그것’에 대해 물어봅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는가.

혹시 무성한 연기만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정녕 그냥 연기만 피워대고 있는 건 아닐까.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

자신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있습니까?  



'FM 영화음악'은 1983년경에 첫 방송을 시작했고 여러 진행자를 거쳐 오다가 조일수 아나운서의 후임으로 1992년 11월 2일부터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1995년 4월에 개편으로 하차하게 되지요. 그 후 동시통역사이자 연극배우인 배유정이 진행을 맡았고, 1998년 가을에 홍은철 아나운서로 다시 바뀌게 됩니다. 2002년 봄 개편부터는 최윤영 아나운서가 DJ를 맡아 진행을 하다가 이듬해인 2003년 가을 개편 때 다시 정은임 아나운서가 진행을 맡게 됩니다. 하지만 6개월 만인 2004년 봄 개편 시기에 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월 25일 방송을 끝으로 'FM 영화음악'은 완전히 폐지되지요. 그리고 그 해 7월 22일에 정은임 아나운서는 불의의 차량 전복사고를 당하게 되고, 수술 후 위독한 상태였다가 8월 4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위키백과, 수정본, 後略]


『곱셈인생』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인맥은 '세는' 것이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