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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May 18. 2017

무엇을 버려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

버려야 보인다 | 프롤로그 저자 원문

1_ 문제는 녹음기가 아니야, 바보야!


조금 웃기게 들릴 수도 있지만, 이 프로젝트는 한 대의 녹음기에서 비롯됐습니다. 세계적인 문명비평가 A와 저 사이의 웃지 못할 해프닝(이름은 밝힐 수 없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이 모든 것의 시작이지요.


2013년 12월 초, 평소처럼 저는 다음에 진행할 새로운 프로젝트를 준비하며 섭외 리스트 1순위였던 A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이러이러한 기획의 프로젝트인데, 시간 내서 참여해줄 수 있겠냐고 의사를 타진했지요. 꽤 쿨하고 강단 있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당신을 위해 공짜로 일해달라는 건가요(You want me to work for you for free)? 인터뷰는 괜찮지만, 새로운 글을 쓰는 등의 시간을 충분히 들여야 하는 일을 무료로 해달라는 건 제 지적재산권을 존중하지 않는 것이기에 거절하겠습니다.”


원래는 한 편의 에세이를 요청하려고 했지만, 이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나오니 달리 방법이 없겠더군요. 그냥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엔 “대답을 녹음할 녹음기가 필요한데, 현재 제겐 녹음기가 없습니다. 인터뷰를 녹음하기에 적절한 녹음기를 하나 추천해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이건 뭐지? ‘스카이프(skype)와 같은 화상 채팅 프로그램 갖고도 충분할 텐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이분이 워낙 연배가 있으신 분이라 녹음기 같은 옛날 방식을 고수하나보다 싶었습니다. 적당한 녹음기를 구할 때까지는 인터뷰 진행이 힘들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까지 흘러오니 이분이 절대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노파심에 재차 확인할 겸 이렇게 여쭤봤습니다.


“혹시 인터뷰에 대해 비용을 지불해야 하나요?” 깐깐한 분답게 이번에도 명확한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제가 녹음기를 제 돈으로 직접 구입하는데, 최소한 그 비용만큼은 당신이 메워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결론만 말씀드리면 이분과의 인터뷰는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를 잘 안 하기로 소문난 이분과 인터뷰를 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얻었는데 돈 얼마 지불하는 게 뭐가 그리 아까웠겠습니까. 서로 이메일을 교환하는 사이 이분에게 다른 일정들이 줄줄이 생겨 물리적으로 진행할 수 없었던 것도 있습니다만, 그보다도 제가 의욕이 꺾였던 것이 진행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입니다. 솔직히 당시 속으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저 정도로 유명하고 잘나가는 분이 뭔 녹음기 하나 사는 비용조차 저렇게 끝까지 받아내려고 하지? 녹음기가 비싸봤자 얼마나 한다고.” 3주 동안 인터뷰를 하네 마네 메일만 몇 십 통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진이 다 빠진 거지요. 유 윈.


2_ 본질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비본질적인 것을 쳐낼 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인터뷰를 진행하지 않기로 정리하고 한 1주일 쯤 지났을까요. A로부터 메일이 한 통 왔습니다. 메일에는 딱 한 문장이 적혀 있더군요. 

     

“당신은 자신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제야 조금씩 이해가 되기 시작하더군요. 이분이 왜 그렇게 녹음기에 목숨(?)을 걸었는지 말입니다. 이분에게 녹음기는 그저 하나의 고철 덩어리가 아닌,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를 상징하는 물건이었던 겁니다. 자신의 일을 스스로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증명하고 대변해주는 매개체였던 셈이지요. 그가 고집을 부렸던 건 결국 자신의 일에 대한 소중함, 나아가 스스로에 대한 자존감에 다름 아니었던 겁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이 나의 일을(혹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들의 생각과 관계없이 내가 나의 일을, 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저에게 알려주려고 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의 메일을 받고 나서 저는 몇 주 동안 참 많은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제가 그 동안 제 일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사회생활을 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어떤 식으로 일을 해왔는지를 돌아보게 됐지요. 돌이켜보니 저는 제 자신의 일을 지나치게 소중하게 생각한 나머지 모든 일에 있어 항상 제 자신을 중심에 놓았던 것 같습니다. 일이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굴러가지 않을 땐 사방팔방 분노를 터뜨렸고, 상대방과 조금이라도 의견 차이가 있으면 귀를 닫아버리거나 굴하지 않는 자존심으로 그의 기를 꺾어놓으려 했지요. 한 건이 잘 마무리되면 친구가 되고 한 건이 틀어지면 상대를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야말로 일희일비하는 작업 스타일을 고수했습니다. 비유컨대 저는 언제나 갑(甲)이었고 제 일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은 을(乙)이었습니다. 일에 대한 애정을 넘어 지나친 자신감이 결국 일의 과정과 결과, 모두 갉아먹고 있었던 거지요.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저는 A 덕분에 잠시 동안이나마 ‘일의 본질’에 대해 복기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가 얻은 게 하나 있지요.


버리기(비우기)


복습의 시간 내내 제 머릿속을 맴돈 단어입니다. 일에 관한 한 나 자신을 좀 덜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것이 본의 아니게 ‘삶에서 덜어내야 하는 것’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군요.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동안 성공을 위해 열심히 달려온 우리는 더 나은 스펙, 더 나은 연봉, 더 나은 삶의 질, 더 나은 나를 얻기 위해 죽자 사자 삶에 ‘덧셈’을 해왔는데, 반대로 과연 얼마만큼 신중하게, 제대로 된 ‘뺄셈’을 해왔을까. 그렇게 ‘무엇을 삶에 더해야 하는가’보다는 ‘무엇을 삶에서 없애나가야 하는가’에 생각의 초점이 모아졌고, 그것은 다시 ‘없앤다면 무엇을 없애고 줄여야 하나’라는 질문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 거지요. 이 책의 컨셉인 ‘우리가 인생을 한층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버려야 할 단 한 가지는 무엇인가’는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겁니다.


3_ 인생에 철학을 더하는 법


2014년 3월부터 8월까지 저는 48명의 세계적인 석학·리더들과 즐거운 소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약 6개월 간 다양한 분야에서 종사하는 전문가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물론 이 책이 지향하는 컨셉처럼 ‘삶에서 버려야 할 한 가지’와 관련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시나요? 2005년 KBS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불멸의 이순신’으로 대상을 수상한 연기자 김명민씨가 무대 위로 올라와 수상소감으로 뭐라고 얘기했는지. 당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최고다, 라는 

어리석은 생각은 버리겠습니다. 

제 자신을 위해서 

연기하지 않겠습니다.”


비유하자면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모두가 한결같이 보여준 자세이지요. 연배가 높든 낮든 ‘내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어떻게, 어떤 식으로 기여할 수 있지?’라는, 이 일이 자신이 정의하는 의미와 가치에 부합하는 일인가를 계속 되묻고 확인했다는 것. ‘내 이야기가 독자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지’, ‘나 스스로 재미를 느끼는지’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 그래서인지 수많은 대화가 오고 가면서 제가 가장 많이 접한 단어 역시 ‘interesting’ ‘happy’ ‘meaning’ ‘contribute(기여하다)’였습니다. ‘내가 이 정도 되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이 정도 수준의 얘기는 해줘야지’, ‘이 정도 대접은 받아야지.’ 식의 분위기는 단 한 순간도 느껴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작업이 다 끝나면 메일로든 통화로든 저에게 확인하고 또 재확인하면서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 내가 더 보충해줄 건 없어? 더 필요하거나 물어보고 싶거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바로 알려줘.”라는 얘기를 들었던 기억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요. 자신이 집필한 원고에 대해 보상을 요구한 분? 시간을 (더) 달라고 한 분은 있었어도 돈을 달라고 한 분은 단 한 분도 없었습니다.


나는 나의 일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는 일을 하는 동안 진심으로 즐겁고 행복한가. 

인생을 좀 더 뜻깊게 만들기 위해 

내가 버리거나 포기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무엇인가. 

     

창조적인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고 하지요. ‘모든 사람의 말을 듣는다’와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다’. 이 책에서 소개된 48명의 전문가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보시되, 다 보신 후에는 말끔하게 머릿속에서 지워보시는 건 어떨까요. 결국 인생을 개척하고 바꿔나가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니까요.  


2015년 7월 

Talent Lab 서재에서

허병민


『버려야 보인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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