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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병민 Jun 17. 2018

그 아이들은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벌써 30년도 넘은 때라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은 야구에 ‘미친’ 나라답게 

여러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 모여 

자체적으로 연합 리그를 만들어 

메이저리그와 똑같은 경기방식과 

룰로 운영을 합니다. 

저도 어릴 적 미국에 살면서 

한 2년 간 선수로 뛰었었지요.   

  

돌이켜보면 저는 운동신경이 

발달한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야구를 사랑했느냐?

그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크게 관심도 없었던 

야구를 했던 건 딱 하나, 

시합이 끝나고 나면 

경기장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매점에서 파는 핫도그를 먹기 위해서였지요. 

세상에 이 핫도그가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그 날 경기를 잘 뛰든 못 뛰든 

끝나고 나서 이거 하나 먹을 생각에 

힘들고 지루한 경기를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핫도그 말고도 

제 머릿속에 또렷하게 박혀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비록 운동신경은 별로였지만 

관찰력과 기억력이 나쁘지 않았던 저는 

경기를 끝내고 운동장을 떠날 때마다 

철창에 걸려 있는 한 문구를 

유심히 쳐다봤던 기억이 납니다. 

속으로 ‘저게 뭐지’ 

‘왜 저런 게 저기에 걸려 있을까’ 

적잖이 궁금해 했지요. 

물론 아쉽게도 핫도그를 먹어치우는 데 

온 정신이 팔려 있어 

어느 누구에게도 물어볼 생각은 못했지만요.


그리고 27년이 지난 

2013년 1월의 어느 날, 

저는 강의를 준비하는 도중 

한 사이트에서 

이 문구와 다시 조우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또 흥미롭게도 

거기에 올라가 있는 사진에도

한 경기장의 

철창 밖의 모습이 담겨 있더군요.



27년 전에는 핫도그 때문에 

궁금증만 간직한 채 

그냥 흘려버렸던 이 문구를 

이번에는 세심하게 살펴보면서 

그 의미를 알아보기로 했습니다.  

     

Parents, your kids are watching.

부모님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운동장에서 경기를 뛰고 있는 선수들은 

이 문구가 보이지 않습니다.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선수들의 친구, 부모, 

기타 주변 사람들에게만 보이지요. 


경기장 밖이라면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지 마세요’ 

‘고성방가하지 마세요’ 

이런 내용이 걸려 있을 법한데, 

엉뚱하게도 선수들이 당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내용이 올라가 있습니다. 

대체 주최 측은 이 문구를 무슨 생각으로, 

어떤 의도로 철창에다 붙여놓은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주최 측이 이것을 걸어놓은 이유는 

생각 외로 간단한 곳에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로 잠깐 돌아가 볼까요. 


다들 백일장 혹은 미술 실기대회에 나가서 

상을 타보신 적, 한 번쯤은 있지요? 

학교 체육행사에 나가서 100m, 뜀뛰기로 

상을 타본 분도 계실 겁니다. 

학급에서 반장, 부반장, 

혹은 다른 부장역을 

맡아본 분도 계시겠지요. 


자, 우리는 그때 

왜 그렇게 죽자 사자 열심히 달렸고, 

왜 뭔가에 홀린 듯 그렇게 열심히 그렸으며, 

왜 기를 쓰고 반장, 부반장이 되려고 했던 걸까요. 

무엇 때문에?


대부분 ‘선생님(주변 친구들) 때문에’라고 대답할 겁니다. 

선생님 혹은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거지요.

선생님이나 친구들 때문이 아니었다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풍토 탓을 해야 할 겁니다. 

‘부모님 때문에’라고.

그 어린 나이에 

‘내 자신을 위해서’라고 생각한 조숙한 분들, 

과연 몇이나 있을까요. 


바로 여기에 철창에 걸려 있는

문구의 정체가 

숨겨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버리지 못하는 욕망이 하나 있지요. 

그것은 다름 아닌 

인정(認定)에 대한 욕구입니다. 

우리가 그 어린 나이에 

그 다양한 일들을 했던 것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잘하면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부모님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습니다’라는 말은 

아마도 이런 뜻일 겁니다.


‘부모님들,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자신을 열심히 쳐다보고 있는 그 눈빛

즉 당신의 인정, 당신의 칭찬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좀 다른 관점에서 풀어볼까요.


한 10-11년 전에

‘경청’이라는 단어가 

크게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물론 이것이 소통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는 데

이견을 다실 분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한 번이라도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우리가 왜 남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동안 경청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서 숱하게 많이 다뤄져왔지만 

우리가 경청을 해야 하는 이유, 

그 밑에 깔려있는 본질에 대해서는 

생각만큼 많이 다뤄져온 것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에 있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비중이나 중요성과는 관계없이 

그 초점은 바로 ‘상대방’ 자신에게 있지요. 


상대방이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이야기’도 이야기지만, 

그것보다는 그 이야기를 하고 있는  

‘나’를 좀 봐달라, ‘나’를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의 이야기에 집중할 거라는 기대감이 

그로 하여금 입을 열게 만드는 

결정적인 동기부여가 되는 거지요.


인정이라는 정신적 만족감에 

목말라있었던 27년 전 경기장 밖의 한 어린 아이,

그리고 실리적인, 물질적 보상에 관심이 많아진  

2013년 1월, 강의를 준비하던 한 나이 든 아저씨.

둘이 보고 있었던 ‘그것’은 과연 뭐였을까요.


그래서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람을 앞에 두고 무엇을 보고 있나요.

일을 앞에 두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요.

그에게서, 또 그 일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욕망하고 있나요. 


살아가면서 힘이 빠질 때마다 

스스로에게 한 번씩 물어볼 일입니다. 


『곱셈인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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