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함의 순도

선한 것에 동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by 피아노래

다정함이 귀한 시절을 살아간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람과 인사하는 것도 어색하고, 어쩌다 눈을 마주쳐 눈인사를 건네면 불편함이 담긴 어색한 반응으로 돌아오기 십상이다. 아이를 키우는 윗집의 층간 소음은 더 이상 배려의 대상이 아니며, 배달을 시킨 식당의 서비스가 맘에 들지 않는 경우에는 좌시하지 않고 별점 테러로 이어진다.


아마도

삶이 고단한 탓일 거다.


그럼에도 SNS에 올라오는 따뜻한 이타적 사연들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개인의 영역을 침투하는 것을 놀라울 정도로 터부시하는 세상에서도 오지랖과 한 끗 차이인 친절함은 여전히 유효하다는 방증이다.




A.

요즘 다시 즐겨보는 <순풍산부인과>의 박영규 캐릭터는 작금의 시청자들 사이에서 ‘영규레기’라 불릴 정도로 이기적이고 식탐 많은 구두쇠로 그려진다. 젊은이들과 밥을 먹을 때도 계산할 때만 되면 화장실에 간다든지, 남의 집 냉장고를 벌컥벌컥 열면서 먹을 게 왜 이렇게 없냐고 핀잔을 주는 식이다.


그런 그가 선의를 베푸는 대부분의 순간은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다. 가령 뭔가 얻어먹기 위해 잔심부름을 해준다든지, 돈을 쓰는데 지독히 인색한 그가 승진을 위해 동료들의 투표가 필요할 땐 연거푸 밥을 사는 등 말이다. 최근에 본 인상적이었던 에피소드는 자신의 상사인 학원 원장에게 어필하기 위해 그가 나가는 동물보호 집회에 동참하는 것이었다. 시위의 주제는 철새 도래지 매립 반대, 수달 보호, 개고기 식용 합법화 결사반대 등.. 그의 장인 오지명은 평소 개고기를 즐겨먹고 동물권에는 관심 없던 사위의 행동을 비꼬지만, 과거의 자신은 그랬을지 모른다 하더라도 이제부터는 자기도 관심을 갖겠다는 것이라며 너무 나무라지 말라고 대꾸한다.



B.

중학교 1학년 때 월드비전에서 개최한 ‘기아체험 24시(Famine 24)'라는 프로그램에 참석을 한 적이 있었다. 실내체육관에 모여 심각한 기근의 고통에 있는 지구촌 식구들을 위해 24시간 동안 금식에 동참하는 시간이었는데, 지치지 않도록 인기가수들의 공연도 많이 있었고 중간중간 개발도상국의 현실에 대한 강의와 공동체 훈련 등도 진행됐다. 무엇보다 연예인을 직접 보는 게 흔치 않았던 어린 시절이라 가는 내내 설렜던 기억이 난다.


아무나 참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몇 달 전부터 지인들에게 이 행사의 취지를 설명해서 후원금을 모집해야 했다. 그리고 그게 얼마든 미리 송금을 한 이들에게 입장권이 주어졌다.


출발하기 전날이었나 같은 반 친구가 자기도 같이 갈 수 없냐고 물어봤다. 집에 와서 “나는 기아를 겪는 사람들을 위해서 열심히 모금을 하고 다녔는데 어떤 노력도 하지 않고 왠지 연예인들 보러 따라간다고 하는 것 같아서 참 웃긴다.”라고 엄마한테 말을 했더니, “이번 계기로 그 친구도 이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면 좋은 거지.“라며 나의 철부지 같은 생각이 무색하게 속 깊은 어른의 대답이 돌아왔다.




선한 일을 하는 일의 대부분의 동기는 결국 자신에게 있다. 사회적 학습에 의해서든 혹은 종교적인 이유든, 선행은 스스로가 동의하고 세운 도덕적 기준에 대한 강력한 순종에 기인한다. 거기서 비롯되는 자기만족의 감수성들이 이것을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가장 이타적인 것은 어쩌면 가장 이기적인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의 선의와 선행에 대해 우리가 함부로 재단할 자격은 없다. 나 역시 오롯이 순전한 의도만으로 그것을 해낸 것이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상상을 좀 더 보태보면 박영규가 억지로 나간 그 시위를 통해 철새와 수달에게 도움이 됐을지도 모르고, 내 친구는 그 행사를 계기로 국제사회복지에 관련된 꿈이 생겼을 수도 있는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누군가의 착함에 대해, 그 결과가 아니라 순도를 먼저 묻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 출발한 것일지라 하더라도 그 결과가 선한 것으로 이어진다면 좋지 아니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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