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에 제품디자이너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경영학에서 석, 박사 공부를 하면서 웹/UX(사용자경험) 디자인 컨설팅 업무를 수행했다. 디자인과 경영에 대한 균형된 시각과 경험으로 우리나라 디자인 산업의 총체적인 문제들을 집어보고자 이러한 글을 적는다.
먼저 우리나라의 디자인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관한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의 '낭객의 신년만필'에 보면 이러한 내용이 있다. "조선에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을 위한 공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공자를 위한 조선이 되고, 부처가 들어와도 부처의 조선이 되며, 기독교가 들어와도 예수를 위한 조선이 된다.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노예의 특색이다." 신채호 선생님이 90여 년전에 한 말이지만, 2016년 '대한민국 디자인 정체성'의 현 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애플사의 노트북, 스마트폰 등의 외관 디자인과 그 안의 소프트웨어의 디자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보면 이를 기반으로 더 나은 우리만의 디자인 정체성을 만드는 잣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어떻게 해야 좀 더 애플을 따라갈 수 있는지, 어떻게 해야 애플 같은 디자인을 할 수 있는지 만을 고민하고 노력할 뿐이다. 이러한 우리의 특색을 볼 때,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나라엔 디자인정책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한국디자인진흥원이 있다. 1970년 한국디자인포장센터라는 이름으로 설립됐고, 한국담배인삼공사(현 KT&G)가 담배와 인삼을 직접적으로 판매 및 관리했듯이, 초창기에는 주로 수출용 포장지(박스)를 판매하는 역할이 주요 업무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디자인의 주요 정책은 수출 제품의 지원, 즉 제품에 대한 포장의 성격으로 발전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한 디자인의 정책 기조는 현재에도 디자인 산업이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통한 독자적 기틀을 마련한다기 보다는 수출 제품에 대한 지원적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제조, IT, 엔터테인먼트산업처럼 독자적인 산업경쟁력을 형성하는 것이 아닌, 디자인은 다른 산업의 보조 및 지원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영향은 대기업과 수출 제품 위주의 디자인산업 구조를 만들었고, 대다수의 디자이너들이 속해 있는 중소 디자인회사들은 발전 없이 애플사 등의 디자인을 따라만 가는 구조를 만들었다.
근래에 디자인경영이라는 것이 화두가 되면서, 정부, 기업, 학계 모두가 그 중요성을 부각하고 있다. 특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등이 디자인 경영에 대한 중요성을 여러 차례 언급하면서, 다양한 관련 연구와 의미 있는 결과물들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 중심은 수출하는 제품을 가지고 있는 대기업이 중심에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기업에 종사하는 디자이너는 전체 22만여명 중에 0.1% 수준(2013 산업디자인통계조사)에 불과한데, 언급되고 있는 대부분의 디자인경영에 관련한 사항들은 시스템과 여건이 갖춰져 대기업의 디자인경영만을 말하고 있다.
세계적인 디자인은 대부분 디자인강국의 중소 디자인회사에서 나오는 것이지, 그 나라의 대기업에서 만들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나라들의 디자인경영은 중소 디자인회사를 중심으로 경쟁력 있는 고부가가치의 디자인 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중소 디자인회사들은 한겨울에 반소매 옷을 입고 있듯이 맞지 않는 디자인경영을 무의미하게 적용하고 있다.
우리의 디자인 대상에 대한 인식의 전환도 중요한 문제다. 애플사에서 처음 아이패드를 출시하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다. 이미 출시 몇 년전에 태블릿PC는 출시된 적이 있고, 소리소문없이 시장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플사에서는 태블릿PC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디자인적 관점으로 본다면 이전의 태블릿PC와 아이패드는 어느 것이 더 좋다라고 쉽게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아이패드의 디자인에 열광하게 되는 것일까. 여기의 핵심은 이전의 태블릿PC는 작은 사각형의 휴대용PC를 디자인한다는 것이었고, 아이패드는 휴대용PC가 아닌 고객이 원하는 서비스를 디자인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제품이 아닌 무형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는 기조를 '서비스시대'라고 한다. 이러한 서비스 중심적 사상을 관련 학계에서는 '서비스중심논리(service dominant logic)'라고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업에서 냉장고를 디자인하는 경우에 그것을 눈에 보이는 커다란 상자로서 인식한다면, 기본적인 형태에서 일탈할 수는 있을지언정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서비스 중심 논리에서는 디자인의 대상은 어떠한 형태가 있는 유형의 존재가 아니고, 단지 음식을 상하지 않게, 신선하게 보관해주는 그 무엇일 뿐이다. 즉, 디자인의 대상은 유형의 제품이 아닌, 대상이 원하는 무형의 서비스로서만 인식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창조성(creativity)에 대해서 말해보려 한다. 디자인은 창조적인 작업이라고 한다.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기 위해서 디자이너들은 노력하고 있다. 그렇다면 창조성'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무언가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조물주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는 성경구절처럼 우리가 알고, 할 수 있는 '창조성'이라는 것은 엄밀히 말해서 재창조다. 이것은 기존에 없었던 결합을 통하여 새로운 의미가 생겨난 거고, 신선한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창조성의 핵심은 기존의 것을 새롭게 볼 줄 아는 사고력과 관점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디자인에서 창조성이라는 것은 예술적 아름다움에서 파생된 외형적인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했던 애플사의 디자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이 과연 제품의 선, 색, 형태 등의 외형적인 아름다움만일까.
창조적인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디자인적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전에 그 대상에 대한 깊이 있는 생각을 통해 정체성을 정립하고 의미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디자인 관련 교육시스템에서 외형적 아름다움을 키우는 창조성과 디자인적 철학을 습득할 수 있는 시간을 비교해 본다면, 후자는 너무나도 미비한 것이 현실이다. 디자인 관련 학과의 80% 이상은 예술대학에 속해 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공과대, 상경대 등에 디자인학과가 존재하는 것에 비교해 본다면 우리나라가 얼마나 예술가적 디자이너만을 양산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디자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보다, 외형적인 개성을 표출하는 시각적 아름다움의 표현방식에만 집중하게 만들었다. 대다수의 디자이너는 컨셉(concept)이라는 것에 집착한다.
우리나라 디자이너에게 있어 컨셉이라는 것은 창조성이며, 전략이며, 디자인에 대한 정체성인 것처럼 여겨진다.
지금까지 대다수의 디자이너와 관련 종사자들이 제대로 된 성장을 할 수 없고, 어려움에 처해있으나, 겉으로는 화려하게만 보이는 우리나라 디자인산업의 문제점들을 다각도로 집어봤다.
우리나라 디자인에 대한 바램은 우리만의 디자인 철학을 가지고, 가수 싸이 같은 차별화된 정체성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타급 디자이너를 지속적으로 키울 수 있는 '디자인 강소기업'이 양산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