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가치 중심에서 과학적 사고(방식)의 중요성 인식
이글은 제가 디지털타임즈에 기고했던 글을 조금만 다듬은 내용입니다.
사람들은 사회, 경제, 정치, 과학 등에서의 새로운 커다란 변화를 얘기할 때, 패러다임이라고 한다. 이것은 1962년 미국의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Thomas Kuhn)이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패러다임이란 ‘한 시대를 지배하는 과학적인 인식·이론·관습·사고·관념·가치관 등이 결합된 총체적인 개념의 집합체’를 의미한다.
천동설과 지동설을 예로 들어 보면, 고대 그리스인들은 항해를 하면서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은 믿지를 않았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인식이자, 사고였고, 가치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천문학자들에 의해 천동설의 문제점이 발견되었다.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것이 부정되고,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이 다양하게 입증되면서 천동설은 완전히 사라지고, 지동설이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 케플러, 뉴턴 같은 학자들이 천체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지동설의 증거를 하나씩 찾아냈다. 그들은 지구가 태양의 주위를 돈다는 것을 증명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하였고, 지동설은 지금까지 공식적으로 인정된 이론이자, 사고인 모범적인 답안이다.
하지만, 만약 지동설을 대신할 새로운 과학적인 인식과 이론의 틀이 나타난다면, 지동설도 역사속의 하나의 가설로서만 존재할 것이다.
디자인에서의 첫 번째 패러다임은 18세기 산업혁명의 시기에 나타났다. 기존의 자급자족 수준에서 혁신적인 변화가 나타났다. 대량생산이 일반화되었고, 대량생산된 제품을 여러 사람들에게 팔 수 있는 차별화된 포인트가 필요했다. 이런 과정에서 현대적인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단순하게 제품이 우수하다는 것이 성능만 좋아서는 소비자가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제품이 아름답게 보이는 것이 중요한 화두가 된 것이다.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감성적 제품이 중요했고, 제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예술적 가치 중심의 첫 번째 디자인 패러다임이 시작된 것이다.
디자인의 중심 가치, 인식, 관련된 다양한 이론들은 제품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상업적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디자인의 핵심 역량은 제품에 심미적 가치를 부여하여 소비자에게 감성적인 만족감을 줄 수 있느냐가 가장 중요하였다. 수 많은 디자이너들이 예술적 가치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다양한 시도를 하였고, 업적을 이루어냈다.
그러나 시대가 발전하면서 세상은 급변하였고, 소비자들은 사용하는 제품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또한 편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디자인은 인간공학, 심리학, 인지공학적인 부분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고, 관련된 다양한 이론이 나왔다. 그리고 디자인에 대한 가치와 사고의 변화는 좀 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융합을 가중시켰다.
소비자가 제품에 원하는 가치는 더욱 복잡해지고 기업에서는 디자인적인 활동이 기업의 생사를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디자인경영을 표방하였다. 디자인경영으로 디자인은 예술적 가치 못지 않게 전략적이고, 과학적 사고가 중요하다는 것이 부각되고 있다. 이제는 디자인에 있어 예술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소비자들이 처해있는 모든 현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논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하게 된 것이다.
디자인의 대상도 변화하였다. 이제 디자인이란 유형의 제품을 디자인 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의 대상은 정적인 제품이 아니라, 이 제품을 기반으로 일어나는 전반적인 생태계를 고려하고 디자인 하는 것이다. 아이폰의 사례를 보더라도 단지 미적 가치가 뛰어난 스마트폰이라는 제품이 성공한 것이 아니라, 앱스토어를 중심으로 하는 무형의 서비스 생태계를 디자인한 것이다.
디자인은 이제 아름다운 형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새로운 무형의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게 해야 한다.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감성과 경제적 전략 그리고 공학적인 이해력 등 세상의 모든 것을 이해해야 한다. 디자이너는 예술적 가치를 극대화 하는 능력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이성적인 판단과 과학적 접근이 모두 중요한 시대가 된 것이다. 이러한 것이 우리 곁에 다가와 있는 디자인의 접근에 있어서의 과학적 사고(방식)의 중요성이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기 위하여 우리나라의 디자인 산업도 다음과 같은 부분을 생각해야 한다.
첫째, 디자인도 다른 산업, 학문과 동일한 조건과 방식으로 평가 받고 판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산업적 정서는 유형의 제품이 아닌, 무형의 서비스에 대한 비용지불에 인식하다. 특히 디자인에 대한 대가를 산정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타 산업에 비하여 기준 자체가 너무 취약하다. 그러다 보니 디자이너의 처우나 산업적 기반은 미약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디자인 산업의 부실한 기반이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디자인은 무언가 다르다 즉 예술적 가치는 함부러 평가하기 애매하다는 인식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한다. 디자인도 다른 산업과 동일한 방식으로 평가되고 인정받을 수 있는 기준이 필요하고, 이러한 부분은 학문적 분야에서 먼저 그 근거를 제시해 줘야 한다.
둘째, 디자인의 가치를 정성적 기준으로만 판단하지 말고, 누구나 공유하고 이해할 수 있는 정량화된 기준도 함께 해야 한다.
디자인 기반 프로젝트들을 보면 최종적으로 합의된 디자인이 최종 의사 결정권자의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변경되는 사례가 많다. 디자인의 판단이 정성적 기준을 중심으로 객관적이지 못한 주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려면 디자인의 판단에서 정성적 가치와 함께 정량화를 도입할 수 있는 노력이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새로운 패러다임인 과학과의 융합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디자인의 시작에서 마무리까지 심미성은 정말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기존의 예술적 가치 중심의 이러한 생각은 디자인을 독자적인 새로운 지식기반 경제성장의 원동력보다는 다른 유망산업의 지원 수단 정도로만 그 의미를 한정해 버린다. 다양한 디자인공학, 디자인경영, 디자인경제 등에 대한 전략적이고 과학적인 노력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한다. 이를 기반으로 지원책이 아닌 디자인산업만의 독자적인 생존 기반을 확보하여야 한다.
결론적으로 디자인은 소수의 전문가적 관점의 ‘예술적 가치 중심’에서 대부분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견해나 사고를 기반으로 출발하고, 관리할 수 있는 ‘과학적 사고(방식)’의 접목이 디자인의 지속 가능성을 키울 것이다.
이러한 과학적 사고(방식)의 접목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디자인 사이언스’라고 할 수 있다. 디자인 사이언스는 디자인의 정성적 가치기반의 한계를 극복하고, 디자인의 가치를 누구나 인정할 수 있도록 과학적 사고와 방식으로 입증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디자인의 산업적 가치와 역량을 향상시키는 전반적인 활동이다. 다시 한번 강조지만, 이 글의 논지는 디자인의 예술적 가치를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극대화 시킬 수 있도록 디자인도 이제는 과학적 사고와 방식의 접목이 중요하다는 것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