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스 더경기, 안진호의 디자인씽킹
본 내용은 '프레스 더경기'에 기고중인 안진호의 디자인씽킹 칼럼 내용입니다.
출처 : Press THE경기 (프레스 더경기)
http://www.thegg.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6
국어사전에서 ‘간과(看過)하다’의 의미는 ‘큰 관심 없이 대강 보아 넘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몇 해 전 우리나라 산업에서는 그동안 간과했던 소재・부품 분야 때문에 큰 위험에 빠졌었다. 2019년 7월 1일 일본 경제산업성은 사전협의나 구체적인 사유 제시 없이 반도체・디스플레이 관련 핵심소재 3종에 대한 수출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고 실행했다. 그리고 8월 28일부터는 한국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국가에서 제외되었다. 이렇게 촉발된 사태로 대한민국은 그동안 간과되어 왔던 소재・부품이 산업에서 얼마나 중요한 지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재・부품 분야는 지금까지 일본에서 값싸고 좋은 품질을 공급받아 왔기에 대한민국은 스스로의 경쟁력을 키우지 못했다. 결국 지속적인 지원보다 앞으로 최소 4~5배 이상의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을 투자해야만 간격을 좁힐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일본 사태 때문에 소재・부품의 중요성이 인식되었기에 모든 기반이 사라지기 전에 그 불씨를 되살릴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산업적 위험이 디자인계에서도 재현될 수 있다. 지정학적 영향과 경제, 산업 구조적 측면에서 디자인산업을 바라본다면 어떤 상황이 나타날 것인가? 미래학적으로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 하나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첫 발단은 수요보다 많은 디자인 인력 공급구조에서 시작된다. 대학에서 연간 4만 5천 명 이상이 배출(KIDP 디자인통계 참조)되는 공급구조에서 디자인 기업들은 난립하게 되고, 한정된 디자인 수요에서 이들의 매출은 한계점 없이 추락한다. 연쇄 효과로 디자이너의 연봉은 다른 업종에 비하여 최저가로 시작하게 되고, 거의 오르지 않게 된다. 이와 같은 악영향으로 국내의 우수 디자인 인력들은 국내보다는 해외 취업을 선호하게 된다. 1차적으로 미국과 유럽으로 진출하고, 나머지 인력들은 중국시장으로 발을 돌리게 된다. 이러면서 국내의 디자인 기업들은 질적 성장의 기회를 놓치게 되고, 점점 더 단순한 작업만을 수주하고 대부분 디자인 기업들은 3년 안에 폐업한다. 결국, 토종 디자인 기업들은 거의 다 사라진다.
하지만, 이런 토종 디자인 생태계의 붕괴를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중국의 디자인 기업들이 그 틈을 메워줬기 때문이다. 한국에 진출한 중국 디자인 기업들은 한국인 매니저로 발주기업과의 원활한 소통을 진행한다. 실제 업무는 중국 본사와 한국 지사에 보유한 풍부한 자체 인력으로 진행한다. 디자인 품질 수준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유럽과 한국 출신의 글로벌한 디자인 인재들이 아트디렉터로서 품질관리를 담당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제2의 사드 사태처럼 중국과 우리나라가 껄끄러운 관계에 놓이게 된다. 중국 정부에서는 한국 경제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수단으로 눈에 띄지는 않지만, 산업 전반의 숨통을 조일 수 있는 수단으로 디자인산업을 선택한다. 갑자기 중국의 모든 디자인 기업에서 한국과의 업무를 중단하고, 한국지사를 철수해 버린다. 삼성, LG전자처럼 내부디자이너가 있는 곳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중소기업들의 R&D 전략에 비상이 걸린다. 국내에서는 당장 양산라인의 디자인을 진행해 줄 수 있는 디자인 기업을 찾을 수 없다.
당장 유럽이나 일본 등의 디자인 기업을 급하게 수소문하지만, 중국보다 훨씬 높은 비용과 길어지는 디자인 작업시간으로 차기 모델의 양산과정에 문제가 돌출된다. 결국 급하게 진행된 디자인 품질의 저하는 메인드인 코리아의 신뢰도 하락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다. 대한민국의 정부와 기업들은 디자인 경쟁력 확보에 다시 총력을 다하게 된다.
디자인산업은 그 가치를 측정하고, 평가하기는 애매하지만 산업적으로 파급효과가 큰 분야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나라에는 토종 디자인산업구조가 붕괴됐고, 이런 상황이 얼마나 국가산업정책적으로 위험한 것임을 아무도 인식하지도 못했었다. 또한, 이로 인한 구체적 피해를 WTO 등에 제소하기도 애매하다.
이런 시나리오를 만들어 보게 된 것은 중국의 커지고 있는 디자인산업의 힘 때문이다. '차이나 디자인 랩'의 '중국디자인, 현재의 위상과 미래의 가능성' 자료에 따르면, 중국은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의 반열에 오르면서 중국 소비자들의 안목 역시 올라갔고 디자인은 제조업을 뒷받침하며 급성장했다. 중국디자인은 과거의 글로벌 브랜드 하청과 복제 위주에서 이제는 디자인적 완성도를 높이면서 세계적 수준에 도달해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알리바바, 바이두, 화웨이, 샤오미 등의 대기업들은 서양의 선진기업들을 따라잡는 전략으로 기술중심의 R&D보다는 디자인에 대한 투자가 더 유효하다는 것을 이해했다.
중국 정부는 다양한 세제혜택 등으로 디자인산업을 전략적으로 육성했다. 베이징, 상하이, 선전, 광동을 중심으로 디자인 클러스터를 육성하고 있다. 시진핑 수석은 중국 역대 주석 최초로 광동의 공업디자인 단지를 방문해 “다음에 내가 다시 올 때는 8,000여 명의 디자이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중국의 디자인 인프라는 1,000여 개 대학에 디자인 학과가 있고, 여기서 전 세계 디자이너의 1/5 이상인 1,700만 명을 양성해 내고 있다. 중국의 디자인산업 규모는 2020년에 4,000억 위한 수준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이와 같은 데이터와 현상들을 종합해 본다면, 최근 중국의 디자인 기업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 디자인 수준 역시 월등하게 향상되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디자인역량이 우리보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아직 바라보는 시장이 우리와 같지 않을 뿐이다. 우리나라가 유럽이나 미국과의 차이가 좁혀졌듯이, 중국도 우리와의 차이를 상당히 좁협다. 지질학적 영향과 국가별 디자인 역량(인력 수준, 품질, 용역단가)을 판단해 보자. 대한민국 산업에서 소재. 부품 산업의 위기는 일본에서 발생했다면, 디자인산업은 중국에서 이 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 기업들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모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작금의 우리나라 산업환경에서 디자인을 공급받는 것은 너무 쉽고, 그 중요성을 간과하고 있다. 약간의 비용으로 디자인을 해주겠다는 온라인 중계 사이트와 오프라인의 프리랜서와 디자인 기업들이 너무 난립해 있다.
우리가 소재. 부품에 대한 뒤늦은 대응으로 엄청나 투자가 필요하듯이, 지금 대한민국이 디자인의 가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근 미래에 아예 회복되지 못할 가능성도 크다. 디자인 산업의 경쟁력 제고는 디자인의 특수성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정책과제이며 질적 성과를 도모하기는 더 어려운 분야다. 이를 고려하면 단기 성과를 독촉하기보다는 디자인 R&D 등의 관점에서 근본적 문제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 향후 기술・산업・문화 측면에서 전략적 입지 선택의 지혜를 필요로 하는 상황인 우리나라는 디자인 산업 경쟁력을 강화하여 산업 재편 과정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위해 전략적 대응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