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는 정체성에 기반한 혁신이 필요하다
본 내용은 디지털타임스에 기고하여 2018년 01월 21일자 23면[DT광장]에 기재된 내용입니다
가죽을 의미하는 한자에는 피(皮)자와 혁(革)자가 있다. 피(皮)의 의미는 짐승을 잡아서 그 가죽을 벗겨낸 처음의 상태를 뜻한다. 혁(革)이란, 그 벗겨낸 가죽을 잘 다듬어 놓은 가공된 가죽을 말한다. 혁(革)이라는 글자의 의미는 먼저 짐승에서 벗겨낸 생가죽인 피(皮)를 여러 번의 다듬질로 옷, 가방, 신발 등을 만들 수 있는 상품성 있는 가죽으로 만들어 놨다는 것이다.
흔히 혁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한다. 가죽을 벗겨내는 것처럼 어려움과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혁신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혁신의 진정한 의미는 생가죽을 벗겨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움을 겪고 이겨내라는 과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의미는 지금 가지고 있는 껍데기일 뿐인 것에 어떻게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지에 대한 노력과 정성의 결과에 집중하라는 것이다.
혁신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이해하고 새롭게 바꿔낸다는 것이다. 지금은 하찮아 보일 수 있는 무언가에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영어에서도 비슷한 의미로 혁신을 정의하고 있다. 'innovation'의 어원을 보면 '안에서 밖으로'를 의미하는 'in'과 '새롭게 한다'는 'nova'가 합쳐진 것이다. 그 의미는 이미 내가 가지고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새롭게 만들어서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혁신인가?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우리에게는 창의성(Creativity)보다는 정체성(Identity)에 기반한 혁신이 필요하다. 다음과 같이 3가지 관점으로 정체성에 기반한 혁신을 정의해 본다.
첫째, 창의성의 개념에는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과정과 행위에 집중한다. 그래서, 그 결과가 의도하지 않게 남들과 겹쳐지는 것이 만들어 질 수 있다. 가수가 신곡을 발표했는데, 비슷한 노래가 있는 경우와 같을 것이다. 또는, 시장에서 의도하지 않게 내가 만든 것과 유사한 제품 또는 서비스가 나타날 수도 있다. 결코 표절하려는 것이 아닌데도, 누군가 먼저 만들어 버리면 나는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반면에 새로운 것을 만들었는데도 외면 받는 경우도 있다. 획기적인 기술이나 서비스의 특허를 가지고 있지만, 아무도 찾지 않고, 사장되는 것들도 많다. 새롭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 앞서가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동의와 호응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사라져 버린다. 창의적인 제품과 서비스라고 무조건 성공하지 않는 것이다. 둘째, 혁신은 일시적인 현상으로 끝나버리지 않고, 지속가능해야 한다. 1995년에 숫자와 단문만 수신되는 '삐삐'를 보조하기 위해 '시티폰'이라는 발신전용 단말기가 출시됐다. '삐삐'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될 줄 알았지만, 스마트폰의 보급이 시작되면서 2000년 1월에 서비스가 중단됐다. 제대로 된 혁신이란 '시티폰'처럼 잠깐의 관심 이후에 사라지는 것이 되면 안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정체성을 '전통'과 혼동하거나 국한시키면 안된다. 이 둘은 비슷한 범주도 일부 있지만, 우리는 그 의미와 가치를 정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찹쌀떡을 만들어서 먹어왔고, 이것은 우리의 전통이다. 그러나, 찹쌀떡은 일본에서는 '모찌'라는 이름으로 세계화에 먼저 성공했고, 그들만의 색깔을 담았다. 찹쌀떡은 우리에게는 전통이지만, 그 정체성은 일본이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정체성과 전통을 혼동하면 안되는 이유다.
2014년에 3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했고, 아시아에서도 사랑받았던 한류드라마로 '별에서 온 그대'가 있었다. 여기에서 주인공(천송이)이 치맥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왔다. 이것은 한류열풍을 타고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중국에서 치맥전문점이 생겼고, 치맥을 먹으러 한국을 오는 관광패키지가 인기였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대표적 한류 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세계 누구나 치맥하면 대한민국만의 것으로 인지됐다. 치맥은 누구나 알고 있고, 좋아하는 닭튀김과 맥주를 합쳐놨을 뿐인데, 우리만의 정체성이 된 것이다. 이처럼 정체성을 굳이 과거의 전통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정리해 보면, 정체성이란 전통에 국한할 필요가 없으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으며, 우리만의 것이라고 인정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일시적 현상이 아닌, 지속가능할 때 우리만의 정체성이 만들어 지는 것이다. 특정한 상황에서 카멜레온처럼 변하는 모습이 아니면서, 가식과 포장을 하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그 본 모습을 '정체'라고 하며, 그 깨달아 진 존재가 바로 '정체성'이다. 우리에게 정체성에 기반한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