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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Mar 30. 2021

전학 왕

일주일의 법칙

나는 지금까지 총 12곳의 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세 곳, 중학교 두 곳, 고등학교 네 곳, 대학교 두 곳, 대학원 한 곳.  이제 다가오는 가을이 되면 13번째 학교에 진학할 예정이다. 어쩌다 이 얘기를 하게 되면 처음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보통 '부모님이 군인이셔?' 혹은 '너 누구한테 쫓겼어?'라는 우스갯소리로 나뉜다. 사실 돌이켜 보면 부모님 직장문제로 내 인생의 최장거리 이사를 가기도 했지만, 나의 전학은 특별한 연유 없이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하다. 


한창 전학을 마스터 해갈 때쯤, 엄마께서 나의 패턴을 발견하고는 '일주일의 법칙'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주시기도 했다. 일주일의 법칙은 통상 이런 순서로 진행된다. 


1. 전학 간 후 첫날 집에 돌아와 엄마를 붙잡고 엉엉 울며 '이 학교 못 다니겠어. 예전 학교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어'라며 대성통곡을 한다. 필수 과정이다.

2. 학교 건물이 이래서 이상하고, 선생님들도 무섭고, 밥도 맛이 없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라며 어떻게든 우울해할 이유를 찾아낸다. 전학 첫 주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를 반복한다. 

3. 딱 2주 차 월요일에 접어들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 동네/학교 토박이처럼 금세 적응을 하곤 눈물이 무색하게 즐거운 학교 생활을 이어간다. 주저함이 없다. 


이렇게 일주일의 법칙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변화를 싫어하는 성향의 사람이라고 정의 내려왔다. 물건을 사도 하나를 오래 쓰는 게 좋고 인간관계에서도 오랜 시간 동안 쌓아온 추억이 있는 관계들이 많다. 물론 단순히 오래된 관계라고 해서 무조건 깊고 좋은 관계인 건 아니지만. 하지만 이와 모순되게도 나는 계속해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적응하며 살아왔다. 한 사람의 성격은 변해도 기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당시 나의 에너지가 당최 어디서 나온 건 지 지금 생각하면 또 다른 자아가 있었던 것처럼 아득하다. 이때의 나는 누가 봐도 절대적으로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MBTI로 따지자면, 확신의 E 유형 인간이었다. '사실 나도 낯을 가려'라고 하면 다들 농담인 줄 알고 말도 안 된다며 박장대소하던 표정들이 떠오른다. 


겁이 많아진 건지 에너지가 다 소진된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는 일상에서의 의미 없는 스몰 톡이 아닌 누군가를 진지하게 새로 알아가고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가 많이 사라졌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욕구가 생길 때도 있지만, 눈 떴다 감으면 이미 오랜 시간 존재를 나눈 그런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게으른 생각만 할 뿐이다.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때면 누구보다도 조용히 있고 싶다. 계속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게 나의 업인지라 퇴근 후 일하는 내 자아는 로그오프 하고 싶은 마음인 것 같기도 하다. 


각기 다른 집단에서 나를 알게 된 사람들 중 일부는 나를 적극적이고 활발하고 주도적인 사람으로 알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은 나를 매우 조용하고 침착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다른 집단 내에 공통지인이 있어 우연히 함께 만나는 일이 생기면, 서로 나에 대한 인상을 나누며 '말도 안 된다 얘가 그렇다고?'만 몇 분간 반복하는 웃긴 일도 있었다.  내가 바로 이중인격? 


앞으로 일주일의 법칙의 힘이 다시 필요해질 순간이 무수히 많이 있겠지만 그 효력이 똑같을 수는 없을 듯하다. 일주일 약발이 먹었던 그때보다 더 조심스럽고 겁도 나고 주저하는 일이 많아졌으니. 그렇게 변화가 싫다면서도 다시 한번 새로운 곳으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는 지금. 삶은 역시 모순이라는 있어 보이는 문장으로 이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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