팝송을 듣는 이유

unusual : 평소와는 다르게

by 뭉게구름

Q. 당신에게 좋은 노래란 어떤 노래인가요?

멜로디가 좋은 노래, 음색 좋은 보컬이 부른 노래, 좋아하는 악기로 채워진 노래...


위와 같은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나는 0.1초의 고민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가사가 좋고 멜로디가 좋은 노래

가사가 좋고 음색이 좋은 보컬이 부른 노래

가사가 좋고 내가 좋아하는 악기로 채워진 노래

가사가 좋은 노래, 나에게는 노래를 받아들이데에 있어 가사는 매우 중요한 척도이다.

나에게 좋은 노래 = 가사가 좋은 노래


왜 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좋은 멜로디를 듣거나 좋아하는 가수의 새 앨범이 나오면 무조건 가사부터 보게 된다. '가사가 좋다' 이것은 마치 내 머릿속에서 [그냥 노래]가 [좋은 노래]로 가는 가장 최전방에 위치한 관문 같은 존재다.


근데 이 생각이 처음으로 깨진 순간이 나타났다.

: 가사가 좋은 노래가 아닌 그냥 그 자체가 좋은 노래


늘 그랬듯,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핸드폰 잠금화면을 푼 뒤 음악 어플을 켜고 샤워를 하고 있었다. 어플에서 나오는 노래들은 세상에 내놓아진 수많은 곡들 중 불특정한 곡으로 랜덤 재생되어 틀어지고 있었다. 듣고 있던 노래가 끝이 나고 다음 노래가 랜덤으로 재생되었다.

다음 노래로 랜덤 재생된 노래는 Sigrid - Mine Right Now.

듣자마자 내 취향인 노래가 재생되어 반가운 마음에 샤워기를 끄고 손에 물기를 닦은 뒤 핸드폰을 집었다.

얼른 저장 버튼을 누르고 다시 샤워부스로 돌아와 노래와 함께 다시 샤워를 했다.

샤워를 하는 내내 '이 노래는 분명 사랑스러운 이야기를 듬뿍 담은 노래겠다'라는 생각이 깊게 머릿속을 덮었다.

샤워를 마치고 아내한테 달려가 노래를 추천해주었다.


"여보 이 노래 들어봐"


우리 둘은 의자에 앉아 말없이 노래를 들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세 번의 반복 재생 끝에 나는 역시 이 노래의 가사가 궁금해졌다.


가사를 보고 나는 속으로 크게 놀랐다.



It’s hard to believe our love could last

우리 사랑이 영원할 거라고 믿긴 어려워

Then I ruin the moment 'cause I picture the end

나는 곧 분위기를 망쳐버려, 우리 사이의 끝을 상상해버렸거든

Hey, it's alright if we don't end up together

그래, 우리가 끝내 함께하지 않아도 괜찮아

(Sigrid - Mine Right Now 가사 中)


내가 샤워를 하며 느낀 것과는 다르게 가사는 사랑스러움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해 보였다.

아니, 가사의 도입부는 내가 느낀 것과 정 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전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닌 노래'


팝송이다 보니 아내와 나는 가사가 아닌 멜로디, 곡의 분위기에만 집중하며 온전히 그 순간 분위기에 취해있었다. 마치 내가 샤워부스에 들어가 '이 노래는 분명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담긴 곡일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과 같이 멜로디가 주는 순수한 행복, 사랑스러움은 아내와 내 주변을 감쌌다.


모순적 이게도,

전혀 사랑스러운 이야기가 아닌 노래가 우리들에게 사랑스러운 추억 한 장을 선물해준 것이다.


늘 가사가 우선되어 노래를 판단하고 들어왔던 나에게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더 나아가,

음악에서 가사라는 녀석은 마치 수학 문제 답안지처럼 느껴졌다

"이 노래는 이런 내용이고 너도 이렇게 느껴!"라고 '가사'라는 녀석이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가사라는 녀석이 이미 만들어 놓은 분위기, 느낌 그대로를 음악을 들을 때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같기도 하다. 과장하면 마치 주입식 교육처럼 말이다.


그래서 문득 팝송이 너무 사랑스러워졌다.

영어로 된 가사들이기에 내가 온전히 멜로디, 아티스트의 순수한 음색, 지금 내가 있는 공간, 지금의 분위기에 녹아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 팝송을 듣는 이유

unusual : 평소와는 다르게



정해진 해답 없이, 정해진 틀 없이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이 우리도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려 보면 어떨까란 생각을 끝으로 키보드에서 손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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