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에서 순례자가 되는 날

순례길 시작을 위해서 레온으로 가는 길

by 서은

마드리드에 온 지 며칠 만에 날씨가 더 추워졌다. 가지고 온 몇 벌 안 되는 얇은 옷을 잔뜩 껴입고 숙소 밖으로 나왔다. 어제 플라멩코를 보면서 마셔댄 와인의 취기가 남아있는 것 같다. 머리는 살짝 멍하고 몸이 둔하고 두 발이 너무 무겁다. 어깨에 맨 배낭의 무게가 온전히 느껴진다. 며칠간의 마드리드 여행을 끝으로 순례자가 시작되는 날이다. 이제 진짜 시작이라니 설렘 반, 두려움 반이었다. 차가운 공기 위로 마음이 붕 떴다가 가라앉는다. 'ㅇㅇ야, 우리 잘 걸을 수 있겠지?'

차마르틴 역까지 이동해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기전에는 익숙하게 커피와 빵으로 아침을 대신한다. 기차에서 한참 수다를 떨다 보니 *팔렌시아를 지나 레온에 금세 도착했다. 여행이 익숙해진 걸까? 나이를 먹은 걸까? 유럽여행을 처음 했던 20대에는 늘 긴장하며 기차를 탔는데 이제 그때처럼 긴장감도 없고 KTX를 탄냥 마음이 이상하리만치 편안하다. 그때 가진 설렘을 잃은 것 같아서 조금 울적하기도 한 편으로는 나이 먹음에 편안하기도 했다.

첫 알베르게에 짐을 풀고 순례자 여권을 발급받을 겸 동네를 한 바퀴 돈다. 고즈넉한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바닥에 있는 조개껍데기 모양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돌담길도 걸어본다. 아시아 식당을 찾아 어쩌면 당분간 먹지 못할 태국음식으로 저녁을 먹었다. 이곳에 한국 라면을 팔아서 좋다는 외향인 한국언니의 말에 귀가 펄럭여 라면 두 개를 배낭에 추가했다. 중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슈퍼였는데 한국음식이 많았다. 여행 내내 중국인이 운영하는 슈퍼를 많이 이용했다. 여행하면서 스페인 어느 시골 마을에도 살고 있는 중국인들에게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우리를 지겨운 빵에서 해방시켜 줬다.

숙소 앞이 바로 레온 대성당이었다. 시간이 맞지 않아 레온 대성당에 못 들어갔다고 생각했는데 사진이 남아있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예배를 보러 들어갔는데 주민만 참여할 수 있는 예배시간이라고 해서 쫓겨났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 파파고를 통해 소통해보려고 했지만, 우리를 나가라고 안내하던 사람은 우리와 소통 따위는 하고 싶어 하지 않았었다. 막무가내로 나가라고 손짓만 했다. 그곳에서 우연히 같은 숙소에 있던 여자분과 만났고 같이 쫓겨났다. 그 여자분은 우리에게 이해할 수 없다면서 계속 투덜댔다. 침낭은 없어서 옷을 덮고 자지만 노트북은 있는 사람. 통이 넓은 펄럭이는 바지를 입고 반스 신발을 신고 걷던 사람. 걷고 있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주려고 했지만 필요 없다고 손사래를 치던 사람. 걷는 동안 우리가 계속 만나게 될 줄은 그땐 몰랐다.

이렇게 레온에서 우리는 여행자에서 순례자로 한층 진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일부터는 누가 뭐라해도 순례자이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순례잡기 시작.


*팔렌시아 : 이곳을 지나갈 때 기차에서 안내방송을 듣고 발렌시아인 줄 알았다. 친구에게 이강인이 축구했던 도시라며 이야기해 줬는데 알고 보니 발렌시아가 아니고 팔렌시아였다. 그리고 우리가 여행하는 동안 발렌시아에 대홍수가 나서 큰 인명피해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