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길 위에서 만난 감정

순례길, 화살표가 사라지면

by 서은
필름 카메라 속 보라색 꽃은 어땠을까?

아홉 번째 순례잡기


거리 : 26km

시간 : 8시 - 16시

도시 : 트리아 카스텔라 - 사리아

tria castela - sarria














순례자의 이정표

새벽 4시,

아직 어둠이 짙게 깔린 방에서 눈을 떴다.


어제 같은 방 할머니가 해가 지기도 전에 주무셔서, 우리는 주방과 리셉션을 전전하다가 피로와 추위를 이기지 못해서 평소보다 일찍 잠들었다. 알베르게가 마음에 들어 떠나기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관리자가 없는 알베르게를 아침에도 둘러보다 나왔다.


오늘은 처음으로 순례길에서 길을 잃었다.


사실 아침부터 고난의 예고편을 보냈었다. 아침에 알베르게에서 나와 조금 걸었는데 화살표가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니 노란 화살표가 보였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반대 방향의 길에 화살표가 있다니, '우리처럼 길을 잘못 든 사람들을 위한 표시일까?' 의문이 들어 구글맵으로 길을 확인했다. 어젯밤에 가는 길을 미리 확인하지 않아서 생긴 실수였다. 그 방향에 길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왔던 길을 조금 뒤돌아 다른 길로 들어섰다. 약간의 찜찜함은 뒤돌아 보길 잘했다는 뿌듯함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화살표가 나타났다. 어제 같은 방을 썼던 할머니를 만났고, 우리를 뒤따라 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순례길에서 스쳐갔었던 청년도 그 길을 걷고 있었다. 그리고 산 길이었지만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까지. 모두 함께 걷고 있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고 순례자길에 오른 사람들

그러나 어느 순간 앞뒤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한참 보이지 않고, 우리 둘만 길 위에 남았다. 점점 짙어지는 고요함 속에서 길을 잘못 든 건 것은 아닌지 불안이 스며들었다. 구글맵을 다시 켰다. 사리아까지 가는 방법은 두 가지였는데, 우리는 순례자들이 잘 다니지 않는 북쪽길 위에 있었다. 제법 넓고 편한 길이라 가볍게 걸어왔지만, 그 길이 원치 않았던 길임을 깨닫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래도 쉴 새 없이 다시 걸었다. 새로운 마을도 나오지 않고 지루한 길이 계속됐다. 지나가는 차도 없고, 우리를 앞지르는 사람도, 뒤쫓아 아오는 사람도 없이, 화살표만 보면서 앞으로 걸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자동차가 나타났다. 우리와 반대편으로 가는 차를 몇 대 지나치자, 어느 순간부터는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잊을만하면 당연히 나타나는 화살표였는데, 잘못됨을 감지하고 다시 구글맵을 켰다. 알지 못하는 어느 순간부터 북쪽길에서도 이탈한 채 걷고 있었다. 분명 이곳까지 오는 길은 하나였던 것 같은데, 너무 이상했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다가, 우리는 조금 돌아가야 하지만, 까미노 길을 찾아 걷기로 했다.


길을 잃은 뒤 만난 전경

까미노 길을 찾아 산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아름다운 전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파란 하늘과 초록 들판만 있는 순간,


마치 윈도우 바탕화면 같은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휴대폰 사진첩에 담고, 다시 까미노 길로 들어섰다.


고난의 길 한복판에서 맞닥뜨린 잠깐의 황홀함이, 길을 잃고 구글맵을 자꾸 켜야 했던 우리의 기분을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길을 걸었는지 중요치 않았고, 길 위에서 만난 우연한 기쁨을 만끽했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았다. 아침엔 뿌연 안개가 몽환적인 장면을 연출했지만, 제일 뜨거운 낮 시간에는 구름이 껴 따사로운 햇볕을 받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전경을 본 후 걸었던 길은 질퍽거렸다. 흙냄새와 소똥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르며, 작은 벌레들이 윙윙 날아들어 얼굴에 닿았다. 지나친 대부분의 마을은 버려져있어 길은 더 쾌쾌했다.


그리고 내가 가지고 간 필름 카메라가 고장 났다는 것도 알게 됐다. 렌즈 커버가 고장 난 것도 모르고, 한참을 커버가 닫힌 채로 사진을 찍었던 것이다. 소중한 순간을 포착한 사진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금세 기분이 다시 꿀꿀해지고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것이 다행일까?' 오늘 하루, 기분은 롤러코스터를 탄 듯했다.


인생에서 내가 원치 않는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회복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지나쳐야 하고,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널뛰는 감정은 여전히 다스리기 힘들다. 오늘 순례길 위에서 이런 상황을 겪고, 받아들이고 다시 앞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닫는다. 내가 바꾸고 고치기엔 늦었다는 것을.


지나간 선택은 보내주자. 그것이 실수이든 아니든. 바라지 않았던 상황도 의연히 보내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담대함을 마음속에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