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똥을 피해서 걷기

순례길에서 본 짧은 인생

by 서은
순례길의 안내자 노란 화살표

여덟 번째 순례잡기


거리 : 26km

시간 : 8시 - 16시

도시 : 라 파바 - 트리아 카스텔라

la faba - tria castela














지젤을 만난 카페

해가 뜨고 또 마을을 떠난다. 걷는 게 살짝 지루해질 때쯤 나타난 작은 마을의 카페에서 또 지젤을 만났다. "씨유순"을 외치며, 지젤은 카페를 떠나고 우리는 카페에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또 헤어진다. 순례길에서는 이런 이별이 특별하지 않다. 그런데 왠지, 또 만날 것 같은 느낌이다. 지젤의 의지와 무관하게, 우리 마음대로 그녀를 우리의 '데스티니'라고 명명했기 때문이다. 그냥, 우리가 정한 대로 흘러간다.


카페에서 음료를 마시면서 잠시 쉬어가는데, 텔레비전에서 지역 뉴스가 흘러나온다. 스페인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리포터가 흙탕물 앞에 마이크를 들고 서 있다. 앞에 앉아있던 순례자가 발렌시아 지역에 큰 홍수가 났다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리에게 말해준다. 이곳은 날씨가 이렇게나 맑고, 마음마저 평화로운데, 화면 속 영상이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세상 밖으로 밀려난 기분이 들었다. 잠시, 우리가 걷고 있는 이 길이 현실이 맞나 싶었다. 그리고 우리는 밖으로 나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걷기 시작한다.


라 파바부터 오 세브레이로까지 언덕이다. 이 높은 산, 제일 높은 곳에 있는 마을이다. 보통 순례자들은 라 파바에 머물기보다는, 오 세브레이로까지 온다. 많은 순례자가 머물기 때문에 먹거리, 볼거리도 많았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도착지'처럼 느껴지는 마을이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착한 오 세브레이로. 우리는 돌담장에 앉아서 잠시 숨을 고른다. 산 아래 아름다운 풍경을 쳐다보다 다시 몸을 일으켜 길을 나선다.


아름다운 풍경과 별개로 코를 찌르는 소똥 냄새

산 꼭대기까지 올라왔으니 이제 내리막 길만 남아있다. 도로 옆에 있는 숲길을 한참 걸었다. 곧 푸른 들판이 나왔다. 어디선가 소똥 냄새가 풍겨온다. 소는 저 멀리에서 풀을 뜯고 있는데, 그 냄새는 내 발 밑에 있다. 소똥을 피하려고 폴짝 거리며 걷는다. 소똥을 피하며 걷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엊그제는 포도주를 만드는 포도밭을 지났다. 할머니들과 서리라는 낭만을 만들었다.

순례길은 매일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어제는 언덕길 바닥에 밤송이가 가득했다. 오래된 등산화가 내 발을 지켜줬다.

오늘은 소똥 밭이다. 소똥을 피하느라 내 발이 바쁘다. 그런데 물기 가득한 그늘에서 만난 소똥 냄새는 피할 수가 없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도 떠다닌다. 거미줄을 치우느라 두 손이 바쁘다. 나중에는 나도 모르게 몸에 걸린 거미줄과 함께 한참을 간다.


순례길은, 생각보다 인생을 많이 닮아있다. 낭만적이었다가 가시에 찔리지만 이겨낼 수 있고, 피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피할 수 없는 것도 있고, 또 애써 외면하고 싶지만, 함께 갈 수밖에 없는 것이 있다.


오늘은 어제 알베르게에서 불을 꺼달라고 돌아다니던 할아버지와 계속 순례잡기 중이다. 작고 깡마른 체격에 오래된 등산화를 신고 걸어가신다. 내리막길도 어찌나 잘 내려가시는지, 나는 계속되는 내리막길에 골반과 무릎이 아파왔다. 산 아래 우리가 머물 마을이 보인다. 할아버지는 신이 나셨는지,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트리아 카스텔라”라고 큰소리로 외치셨다. 그리고 헐레벌떡 뛰어내려 가신다. 아 드디어 오늘의 순례길을 마무리할 수 있겠구나. 나도 괜히 할아버지만큼 신이 났다.


트리아 카스텔라의 돌집 알베르게

마을이 보이고도 한참을 걸었다. 이 길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어느새 뒤에서 지젤이 나타나 우리를 추월해 마을 초입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할아버지도 공립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우리는 공립 알베르게를 지나 예약해 둔 조용한 알베르게를 향했다.


오늘은 창가에 작은 탁자가 있는 알베르게다. 오늘도 알베르게가 무척 마음에 든다. 지하에 식당부터 2층에 있는 침실까지 있는 꽤 큰 알베르게였는데 사람은 셋 뿐인 것 같다. 우리 둘과 몸이 좋지 않으시다며 낮부터 주무시고 계시던 머리가 하얀 여사님이 있었다. 사람이 없으니 밤이 되자 조금 으슥한 기분도 들었다.


여사님이 계속 주무셔서 방에 불을 켜지 못했다. 우리는 이른 시간에 하루를 마무리하기 아쉬워 괜히 리셉션을 전전하며 그곳에서 일기도 쓰고 등산화도 정리한다. 그런데 리셉션 벽난로에 손을 녹이는 것으로는 추위를 이기기에 부족했다. 그렇게 우리도 일찍 잠을 청한다. 오늘은 피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걸어온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