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만큼, 내일이 기대되는 순례길

K팝에 기대어 올라가는 언덕길

by 서은
라 파바로 가는 길

일곱 번째 순례잡기


거리 : 23.5km

시간 : 8시 30분 - 15시

도시 :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 라 파바

villafranca del bierzo - la faba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 아름답고 조용한 동네였다. 작지도 크지도 않은 마을이라 걷기에도 좋았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마트도 있었다. 우리에게 본인이 거래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보여주며 그 제품이 한국 제품이 맞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고마운 마음에 엄지를 치켜세워줬다. 알고 보니 그 마을은 스페인 하숙을 촬영한 동네로 유명한 곳이었다. 어쩐지 레스토랑이 늘어져있는 광장에 한국인들이 많았다.


알베르게도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건물 가운데 큰 중정이 있는 건물이었다. 도착하면 웰컴드링크로 레몬물을 준다. 목이 말랐던 나는 연거푸 두 잔을 마셨다. 커튼만 치면 2인실로 변하는 안락한 방을 배정받아서, 짐도 풀어놓고 빨래도 널어놓고, 편안하게 친구와 저녁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스페인 어느 숲 속

라 파바로 가는 길바닥에는 밤송이가 가득했다. 오래됐지만 튼튼한 내 등산화가 유독 든든하게 느껴진다. 끝나지 않는 비탈길에 체력의 한계가 오는 것 같다. 포기하고 싶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또 다른 든든함에 의지한다. K순례자에게는 K팝이 있다. 스페인 시골 산길에서 멜론을 켠다. K팝이 울려 퍼진다. 평소에는 잘 듣지도 않는 이이돌 언니 오빠들 노래를 따라 부르며, 정신줄을 놓고 오르막길을 오른다. 제정신으로는 오를 수 없는 길이다. 혹여나 멈추면 다시 걸을 수 없을 것 같아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이 숲길은 K시골의 뒷동산처럼 생겼다. 이 프레임만 놓고 본다 하면 감히 누가 이곳을 스페인 숲 속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발목 꺾이는 비탈길이 멈출지 모르고 계속된다. 한 발이 땅에 닿기 전에 다시 한 발을 땅에서 뗀다. 축지법이 왜 나왔는지 알 것 같다. 그렇게 걷지 않으면 영영 두 발이 땅이 붙어있을 것 같다. 오늘도 짐을 부치고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쯤 항상 내 앞에서 걸었던 친구는, 오늘만큼은 나의 케이팝 러시를 감당하지 못하고 내 뒤에 쳐져있다.

라 파바의 하나뿐인 BAR

멈추지 않고 올라온 라 파바. 그동안 머물렀던 어떤 곳보다 작은 마을이다. 알베르게 하나. 음식도 음료도 제대로 없는 바 하나가 전부이다. 하지만 산꼭대기 이 마을이 너무 평화롭고 아름답다. 짐을 풀고 바에 가서 캔 음료를 하나씩 시키고 야외 테이블에 앉는다. 사방이 아름다운 산으로 둘러싸여 초록색 풍경으로 가득하다. 이 평화로움이 산을 오르는 이유였던가? 차마 그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지 않아 아쉽다. 한참을 머물다 내일을 위해 알베르게로 돌아간다.


오는 길에 현지 식료품점에서 구입한 햄을 넣고 김치볶음을 만들어 뽀얀 흰쌀밥과 맛있게 먹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하늘에 가득 별들이 보인다.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은, 별자리가 무색할 만큼 촘촘히 박혀있다. 은하수도 펼쳐져 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하고 있는 우리 앞을 지나가며 관리 아저씨가 말한다. “It's magic” 정말 아름답네요. 오늘 밤을 보내면 이 아름다움을 잊을 수 있을만한 매력을 가진 어떤 동네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오늘도 내일에 대한 기대를 가진다.


어제 머물렀던 마을과 알베르게가 무척 마음에 들어 아침에 떠나올 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라 파바에 도착하자 그 아쉬움은 금세 사라졌다. 순례길을 찾는 사람들은 한 여행지에서 오래 머물며 여행의 의미를 찾기보다는 길 위에서 여행의 의미를 찾고 있기 때문일까? 길고도 먼 여행길이다. 그리고 걸어야만 볼 수 있는 풍경과 시선은 나를 다시 일으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 길 위에서 찾은 의미에 대해서 나는 아직도 잘 모른다.


팔을 앞뒤로 마구 흔들고 가는 순례자

다시 만난 스페인 할머니들, 데보라와의 첫 만남, 팔을 앞뒤로 마구 흔들고 가던 언니, 바닥에 떨어진 바늘을 단번에 찾아냈더니 눈이 똥그래져 박장대소하던 브라질에서 온 벤 데이비스를 닮은 청년. 오늘 만난 이들이 그 의미일까?


장기간 다녀온 여행 후, 오랜만에 만난 전 직장 동료가 물었다.

어떻게 여행은 잘 다녀왔어요? 앞으로 할 일이나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고 왔나요? 결정이 됐나요?

아니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어요. 앞으로 갈 방향에 대해서 생각하려고 떠난 여행은 아니에요. 이제부터 결정하고 나아가야죠.


나는 그저 내가 살아가는 이곳과 잠시 이별하고 싶었다. 영원한 이별은 아니다. 여행이라는 짧은 이별은 나에게 다시 시작할 힘을 준다. 머리가 복잡하거나 새로운 선택을 할 때는 잠시나마 멀리서 바라보는 시간이 필요하다. 늘 있던 곳에서는 객관적인 시선이 사라지고 바라보는 시각이 편협해지기 마련이다. 여행이 완벽한 정답을 가져다주지는 않지만, 상황을 조금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혼란한 마음을 떨쳐 보내고 자신을 다시 들여다볼 수 있는 여행이 되길 바랐다. 나는 마음이 혼란스러워 무엇이 맞는지 모를 때는 해야 할 일이나 일어난 일을 하나하나 적고 지워보는 습관이 있다. 그것이 아주 작은 일일지라도 나 스스로를 올곧게 세우는데 조금 도움이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로 떠나는 일은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지만, 내가 노트에 적었던 것 중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