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움이 없는 길 위의 인사
거리 : 25.4km
시간 : 8시 - 16시
도시 : 폰페라다-비야프랑카델비에르소
ponferrada-villafrancadelbierzo
오늘도 배낭을 보내고 가볍게 걷는다. 오늘은 대부분 평지라고 하니 더 기운이 난다.
항상 혼자 걷고 있던 우리가 운명이라 불렀던 지젤. 그리고 어제부터 우리 앞에 나타난 허리가 구부정한 할머니 두 분. 엎치락뒤치락 순례잡기를 하면서 함께 간다. 지젤은 틈틈이 멈춰 담배를 피웠고, 우리를 만나면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줬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계속 말을 거신다. 큰 목소리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니 잔뜩 경계심이 생겼다. 그래도 길 위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니 조금 친근하게 느껴진다.
길 양 옆에 끝없이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저 멀리 포도밭에서 할머니들이 서리를 하고 계셨다. 성큼 성큼 우리가 가까이 다가가니, 한 분은 서리를 하다가 멋쩍으셨는지 순식간에 저 멀리 달아난다. 한 분은 우리에게 vino를 만드는 포도라 알려주시고는, 알맹이를 한움큼 따서 입안에 넣고선 오물거린다. 며칠 사이 길가에서 사과 서리를 하는 친구들, 옥수수 서리를 하는 커플, 포도 서리를 하는 할머니들을 목격했다. 이쯤 되니 나도 한 번쯤 서리를 해도 될 것 같다.
서로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다 언덕에서 할머니들을 앞지르는 순간, 어찌 그 때가 마지막인 걸 아셨는지 우리에게 "Adiós"라고 하신다. 친구가 뒤돌아 "No Adiós"라고 하니 "Hasta luego"[아스따 루에고]라고 하신다. 어쩌면 다시는 볼 수 없을 두명의 동양인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는 할머니들의 마음이 어땠을까? 괜히 가슴이 찡하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앞을 향해 걷는다.
예약한 알베르게가 있는 동네 초입에 도착하니, 지젤은 길 아래 알베르게에 도착해 담배를 피우고 있다. 길가 카페에서 여러 번 쉬고 있는 모습을 봤는데 우리보다 빨리 도착해 있다. 우리가 높은 곳에서 "Hola"를 외치니 올려다보며 손을 크게 흔든다. 나도 할머니들처럼 "Adiós"를 외치고 지나쳐온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또 만나게 된다는 것을 안다. 길을 걸으며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때론 그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다시 만나지 않아도 괜찮다. 이 길은 누군가 우연히 만나고, 또 웃으며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곳이다. 이 길의 의미는 무엇일까.
스쳐 지나가는 마을의 주민들도, 지친 나를 앞질러 가는 순례자들도 나에게 'Hola'를 외치며 내가 가는 길을 응원해 준다. 순례길을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조개껍데기 모양의 길 위에서 한 곳을 향해서 걷고 있다. 비록 함께 걷진 않지만,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다.
서로 말을 잘 통하지 않아도, 이곳을 걷는 이유는 'Hola'하나로 충분해 보였다. 인사를 받으면 왠지 모르게 힘이 났다. 그래서 나도 그들을 응원하고 마음으로 그들보다 먼저, 그리고 큰소리로 인사를 건넨다. 'Hola' 인사 하나로 순례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연대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마을과 마음에 드는 Albergue를 만났을 때도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처음엔 그곳을 떠나는 것이 아쉬웠다. 동네 산책은 어젯밤 한 번으로 부족한 것 같고, 마음에 드는 공간은 더 오래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걷고 있는 모든 이가 한 곳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숙소에만 있다가 동네를 떠나기도 하고,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는 날에는 씻고 먹는 데 시간을 다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게 꼭 아쉽지만은 않았다. 어디에도 미련이 많은 사람이지만 내일 마주할 길을 걸을 용기와 새로운 도시에 대한 설렘이 더 크게 생겼기 때문이다.
이 길에서는 떠나는 연습을 매일 한다. 이름을 묻지 않아도,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이별을 경험한다. 어느 순간 사람들에게도 알베르게에도 아쉬움 없는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Hola' 그리고 'Adió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