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취한 벤자민 아저씨.
거리 : 26km
시간 : 9시 - 5시
도시 : 폰세바돈 - 폰페라다
foncebadon - ponferrada
어제 친구의 제안으로 짐을 폰페라다까지 보내기로 했다. 필요한 물건만 빼서 작은 가방에 넣고, 배낭을 싸서 방 밖에 내놓았다.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순례자를 위해서 배낭을 원하는 곳까지 배달해 주는 서비스가 있다. 순례길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 서비스를 이용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도 이렇게 빨리 사용하게 될 줄을 더더욱 몰랐다. 몸이 아프고 나니 이런 서비스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나 동네, 혹은 시즌에 따라 가격이 다른데 오늘은 배낭 하나당 6유로이다. 6유로를 봉투에 넣어놓는다.
호스텔 1층으로 내려와 아침을 주문했다. 친절한 아저씨가 주문을 받는다. 어제 주인 언니도 친절했는데 아저씨도 친절하다. 두 분은 부부인 것 같다. 베이컨에그 샌드위치 두 개, 라테 한 잔, 오렌지 주스 한 잔을 시켰는데 오렌지 주스를 두 잔 줬다. 귀찮아서 그냥 먹기로 한다. 조금 추운 것 같으니 내친김에 따뜻한 차도 하나 더 시켜서 마신다. 오픈 샌드위치 위에 새까맣게 타버린 베이컨이 올려져 있다. 너무 딱딱해서 입천장이 다 까져서 없어질 것 같지만, 오늘은 걸어야 하니 입에 욱여넣었다.
오늘은 절대 춥지 말자. 있는 옷을 다 껴입고 출발했다. 경량 패딩이 기모 맨투맨보다 작아서 패딩을 먼저 입고 그 위에 맨투맨을 뒤집어썼다. 어제 산 털장갑을 꼈다. '엊그제 산에 오르기 전 길가에서 털장갑을 샀더라면 아프지 않았을까?' 쓸데없이 '만약에' 시리즈가 머릿속을 빙빙 맴돈다.
어제부터 해가 뜬 후에 숙소를 나선다. 하루의 시작이 처음보다 조금 느려졌다. 캄캄한 새벽에 나서지 않으니 조금 게을러진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배낭이 없으니 한결 몸이 가볍다. 석촌 호수를 산책하는 것처럼 부담이 없다. 멀리 산을 쳐다보니 흡사 강원도 어디쯤 있는 것 같다. '나, 다시 한국인가?' 걷는 동안 날씨가 더웠다 추웠다 하여 나도 껴입은 옷을 벗었다 입었다 반복한다. 가방이 없으니 옷을 허리에 묶었다 풀었다 반복한다.
멀리서 쳐다보니 저 아래 동화 같은 마을이 보인다. 엊그제 잔뜩 올라왔으니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나 보다. 테라스가 있는 카페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쉬어가고 있다. 우리도 테라스가 있는 케이크 가게에 도착했다. 테라스에 앉지는 않았다. 그리고 콜라와 레몬 음료를 시켜 먹는다. 케이크는 먹지 않는다. 겨울인데 온통 차가운 것뿐이다. 음식도 음료도 다 차가운 것뿐이다. 혹여나 탈이 날까 차가운 음료를 천천히 조금씩 마신다. 따뜻한 실론티. 따뜻한 베지밀. 한국 편의점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따뜻한 음료가 생각났다. 아프고 난 뒤에는 더 절실히 생각났다. 너무 당연했던 것들을 이곳에서는 당연하지 않다.
젊은 주인장 아저씨가 직접 만든 케이크를 쇼케이스에 진열해 놨다. 차가워 보이는 케이크다. 입맛이 돌지 않는다. 맛있겠다. 예쁘다. 맘에 없는 말만 하며 구경만 잔뜩 한다. 주인장 아저씨의 예쁜 딸이 친구와 가게 안팎을 오간다. 순례길에서 처음 보는 어린아이였다.
조금 있으니 술에 잔뜩 취해 얼굴이 벌게진 남자가 계산을 하러 가게로 들어온다. 이름은 벤자민. 엄청 큰 배낭을 메고 있다. 주인장 아저씨가 벤자민 아저씨의 배낭 메는 것을 도와주며 '이제부터 내리막이다' 라며 응원을 해 준다. 그런데 벤자민아저씨는 내리막은 싫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I hate downhill." 아저씨의 진실된 고함에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너무 공감이 되어 친구와 킥킥거린다.
벤자민 아저씨가 떠나고 우리도 다시 순례길을 시작할 준비를 한다. 케이크 가게가 보이기 시작한 순간부터 계속 내리막 길이었다. 쥐라기 공원에 나올 법한 협곡. 이게 순례자를 위한 길이라고? 비가 많이 오면 새까만 계곡물이 쏟아질 것 같다. 양옆에 있는 숲은 우리 키보다 높고, 바닥은 미끄러운 바위 투성이다. 혹여나 미끄러질까 봐 발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바닥만 보면서 걷는다. 그리고 술을 한잔 걸치고 큰 배낭을 멘 벤자민 아저씨가 넘어질까 자꾸 앞을 힐끗힐끗 보게 된다. 오늘은 나 혼자 벤자민 아저씨와 순례잡기 중이다.
협곡이 끝나고 산 아래 마을이 보인다. 이제 산길이 끝났나 보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처음 보는 한국 청년이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쏜살같이 우리를 지나간다. 실로 그 속도가 엄청 빠르다. 내리막 산길을 총총총 뛰어가더니 어느새 저 멀리 마을 안으로 사라져 뒷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역시 젊어서 체력이 좋구먼. 허허허. 친구는 순식간에 지나간 그 청년이 본인 이상형이라고 한다. 친구의 눈은 내 눈보다 더 빠르다. 얼굴을 보지 못한 나는 그 청년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졌다.
산 아래 슈퍼에 들러 물 한 병을 샀다. 맘씨 좋은 주인 내외가 번갈아 견과류를 손에 쥐여준다. 들어갈 때는 아저씨가 한 움큼, 나올 때는 아주머니가 한 움큼. 두 분이 서로 눈이 마주치며 이미 줬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그냥 호탕하게 웃어주면 그만이었다. 이 정도면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고 나누어 주려고 내놓은 거 아닐까 싶다. 친절한 부부가 서로 똑 닮아있었다. 작고 깊은 마을에 행복한 부부가 사는 것 같다.
그렇게 도착한 폰페라다는 순례길을 걸으며 여태껏 본 적 없는 큰 도시였다. 우리 짐은 알베르게가 아니고 길 건너 도박장 같은 카페에 배달되어 있었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다시 밖으로 나가 배낭을 찾아왔다. 방은 4인실. 맞은편 2층 침대의 순례자는 계속 잠만 자고 있다. 일어날 때마다 괜찮은 건지, 밥은 먹었는지 물어본다. 아픈 게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냥 피곤하다고 했다. 엊그제 우리처럼 아픈 거면 어쩌지? 며칠 전 아팠던 게 떠올라 괜히 더 신경이 쓰인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순례자를 다른 알베르게에서 만났고, 우리를 알아보고선 오늘은 밥을 먹었다고 말했다. 그리고선 오늘도 피곤하다고 말했다. 하하하하. 다행이다. 아프지 않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