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즙 한 오렌지 주스 두 잔
거리 : 5.6km
시간 : 9시 30분 - 12시
도시 : 라바날델까미노-폰세바돈
rabanaldelcamino-foncebadon
어제 친구와 번갈아 가며 먹을 걸 토해냈다. 어제 먹은 것이라고는 소시지와 감자튀김이 전부였는데, 추워진 날씨를 간과하고 무리하게 걸었던 것이 문제였나 보다.
새벽부터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났다. 우리도 다음 순례자를 위해 침대를 정리하고 짐을 챙겼지만, 도저히 걸을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 관리인에게 지하 살롱에서 잠깐 쉬어가겠다고 했다. 몸이 아직도 차가운 것 같다.
벽난로 앞 의자에서 눈을 감고 쭈그리고 앉아있으니 금세 9시가 넘었다. 더 이상 우리를 봐줄 수 없었던 백발의 할아버지가 들어오셔서 "레이디스 이제 이곳을 떠나야 해"라고 하신다.
이 알베르게는 기부로 운영하고 있었고 이틀 이상 묵을 수 없는 곳이었다. 순례길 위에서 모든 순례자가 알베르게를 공평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시스템이다. 다음 순례자를 위해 우리는 이곳을 떠나야 했다. '몸이 아파도 봐주는 게 없구나.' 몸이 좋지 않으니 별거 아닌 말에도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이 상태로 걸으면 안 될 것 같아 주방에 들어가 친구와 빵 하나를 나누어 먹고, 나는 정신을 차리려고 커피를 석 잔이나 마셨다. 그리고 알베르게 밖으로 나왔다. 9시가 넘었는데도 해는 뜨지 않았고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다.
10미터쯤 걸었을까, 도저히 더는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바로 앞 카페에 들렀다. 음식은 들어갈 것 같지 않아 오렌지 주스 두 잔을 시켰더니 직접 착즙 한 주스를 내어준다. 한 잔을 마시니 당이 채워져 조금 살 것 같았다. 우리는 한 잔씩 더 시켜 두 잔씩 들이켜고 10유로를 냈다.
그날 이후로 카페에 들어가면 착즙기가 있는지부터 살피게 되었고 음료 대신 오렌지 주스를 시켰다. 오렌지가 뱅글뱅글 기계 안에서 돌다가 쑥 빨려 들어가, 샛 노오란 주스로 흘러나온다.
마음에 드는 도시가 나오면 하루쯤 더 머무를 요량으로 일정에서 남겨뒀던 하루를, 예상치 못한 컨디션 난조로 쓰게 됐다. 아까운 하루였지만, 남겨둔 하루 덕분에 남은 길을 무리하지 않고 걸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마을에 있는 다른 알베르게를 찾아서 쉬어도 됐지만 우리는 괜히 그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다음 마을이 나오기까지 5.6km. 어제 바람을 맞으며 꽤 높은 곳까지 올라왔던 모양이다. 우리는 거의 산 꼭대기에 있는 것 같았다.
산길은 험했다. 좁은 자갈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더 이상 오를 곳이 없는 산등성이를 한참 걸었다. 오늘은 발바닥이 아프지 않았지만, 발걸음은 유난히 무거웠다. 앞으로 나아갈 힘이 없어 억지로 걷는다. 자동차도 들어올 수 없는 이곳에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우릴 구출하러 헬리콥터라도 오는 날엔, 한국뉴스에도 나올 것이다.
오늘은 걸음이 느리다. 오늘도 어제처럼 바람이 많이 불었다. 건너편 산 꼭대기를 쳐다보니 눈이 덮여 있는 것 같다.
"친구야 저기 눈 맞니?"
몸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내일도 걷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걷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배낭끈을 풀 기운도 없어 배낭을 멘 채로 땅바닥에 앉아서 쉬고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5.6km를 걷는데 두 시간 반이 걸렸다. 평소라면 한 시간에 4km 정도는 걸었을 텐데, 두 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나타날 것 같지 않던 마을이 저 멀리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 정말 푹 쉬고 싶었다. 폰세바돈이라는 조용한 마을이었다. 우리가 늦은 건지, 길가에 사람 하나 없고 안개만 가득했다.
숙소를 찾려고 길가에 서서 리뷰를 보고 있는데, 순례자가 나타났다. 우리가 망설이고 있는 걸 보더니 "이곳은 정말 완벽해. 여기에서 쉬어"라고 말했다. 순례자의 추천으로 우리는 곧장 숙소로 향했다.
현장 결제의 맛. 부킹닷컴보다 저렴하게 방을 얻었다. 그런데 정원이 세명인 패밀리 룸을 줬다. 두 명인데 이 방이 맞냐고 재차 묻자 맞다고 했다. 오늘은 알베르게가 아니다. 난방이 되는 따뜻한 숙소이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부터 온기가 느껴졌다. 온기에서 설렘이 느껴질 줄이야. 난방이 된다는 사실이 이렇게 감사한 일인 줄 몰랐다.
삐그덕 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 천창까지 있는 방이다. 침대는 세 개, 침대 위에는 웰컴 사탕과 웰컴 수건이 놓여 있었다. 환영받고 있다는 느낌에 마음까지 따뜻해진다. 오늘은 침대에 이불도 깔려 있어 침낭을 꺼낼 필요가 없다.
도착 루틴을 마치고 라디에이터 위에 빨래를 올렸다. 두꺼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오늘은 춥지 않게 잘 수 있겠구나. 우리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한참을 자고 눈을 뜨니 밤이었다. 빨래도 얼추 말라있었고 저녁을 먹어야 할 것 같아 1층으로 내려갔다. 1층에는 카페를 운영하며 순례자들을 위한 온갖 잡화도 팔고 있었다.
낮에 숙소비를 결제하면서 장갑을 하나 샀다. 어제 주민들이 팔고 있었던 장갑보다 예쁜지, 품질이 좋은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방한용품이었다. 장갑에는 영어로 ‘SPAIN’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중에 집에 가면 이 날을 기념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을 먹으려고 했지만 이미 주문이 마감됐다고 했다. 먹어야 내일 걸을 힘이 날 텐데, 먹을 게 없다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엊그제 사두었던 컵라면이 생각나 뜨거운 물을 부탁했다.
오 마이 갓. 라면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질 않았다. 아직도 컨디션이 회복되지 않는 모양이다. 작은 컵라면 하나를 다 먹지 못하고 남은 걸 버려달라고 하자, 주인 언니가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다시 방으로 올라왔다. 친구는 이 상태로는 배낭을 메고 걷기 어려울 것 같다며 내일은 배낭을 다음 마을로 옮겨주는 서비스를 이용하자고 했다.
한국에서는 '동키 서비스'라고 부르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면 알아듣지 못했다. 이제는 당나귀도 없는데 아직까지 그렇게 부를 리 없지. 누가 그 이름을 한국에 퍼트렸는지 궁금해졌다.
보통 '하코 트랜스'라고 불리며,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짐을 옮겨주는 서비스 업체 이름 중 하나였다. 알베르게 카운터에는 업체 이름이 적혀있는 봉투들이 놓여 있고, 그중 하나를 골라 왓츠앱으로 원하는 도시 이름과 배낭 개수를 보내면 금액을 알려준다. 그 돈을 봉투에 넣어 배낭에 매달아 두면, 다음 숙소로 알아서 옮겨준다.
이제는 우리 몸이 주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기로 한다.
내일은 조금 가볍게 걸을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