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오늘은 운수가 좋더라니
거리 : 19.8km
시간 : 8시 - 14시
도시 : 아스토르가-라바날델까미노
astorga-rabanaldelcamino
이곳에서 불면증은 사치다. 낮에 걸었던 일들을 일기장에 쓰다 보면 금세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아침이다. 어제저녁 내내 친목 활동으로 방을 들락날락거리며 주무실 것 같지 않던 아주머니는 우리보다 먼저 준비를 마치고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우리도 어제 사놓은 빵과 사과로 배를 채우고 해가 뜨기 전에 다시 순례길에 오른다. 준비를 마친 후 계단을 내려오는데 웅장한 음악에 얹어진 성가 소리가 들려온다. 건너편 성당에서 들리는 성가 소리일까 싶었는데, 1층에 내려오니 소리가 더 커진다. 알베르게에서 성가 음악을 틀어놓은 것이다.
성가 소리가 오래된 건물과 어우러져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니, 어제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저절로 두 손이 모아진다. 오늘은 배웅해 주는 사람은 없지만 이 성가가 우리의 안전한 순례길을 염원해 주고 축복해 주는 느낌이다.
나는 순례길을 걷는 내내 아침에 준비시간을 줄이기 위해서 다음 날 입을 옷을 입고 잠들었다. 사실 입을 옷이 없기도 했지만, 준비 시간을 줄이기 위한 전략적인 것이라고 치부하기로 한다.
짐을 줄이기 위해 매일 빨래를 해야 하니 상하의는 잘 마르는 재질의 옷으로 두 벌을 준비했다. 가진 것 중에 제일 얇고 땀이 잘 마르는 여름 운동 바지 한 개 와 얇은 레깅스 한 개, 역시 땀이 잘 마르는 운동 티셔츠 두 장을 가져갔다.
그리고 선선한 날씨를 대비해 얇디얇은 바람막이 하나, 추워질지도 모를 날씨를 대비해 경량패딩 하나, 그리고 패션과 추위도 같이 해결해 줄 '큰 배낭을 메고 걷고 있는 사람'이 그려진 기모 맨투맨 하나, 이게 내 옷의 전부였다.
기본 상하의 두 벌 밖에 없던 나는 한 벌을 입고 걸은 후 그날 저녁에 세탁을 했고, 나머지 한 벌을 입고 저녁을 보내고 입은 채로 잠자리를 청하고 다음 날 그 위에 경량패딩이나 기모 맨투맨을 겹쳐 입고 길을 나섰다. 세 번째 순례길 아침에도 어김없이 어제 입고 잔 옷 위에 기모 맨투맨을 입고 알베르게를 나선다.
'카우보이 햇'을 쓴 멋쟁이 아저씨가 내 앞에 가고 있다. 오늘 나와 순례잡기를 할 사람이라는 것이 직감한다. 등산 모자 대신 '카우보이 햇'을 쓴 아저씨는 어렸을 적 봤던 서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아우라가 있다.
아저씨와 뒤서가니 앞서거니 하고 있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멈춰 서서 교통 표지판에 붙어있는 작은 스티커를 찍는다. 어떤 사진을 찍는지 궁금했지만, 나는 사진을 찍고 있는 아저씨를 뒤로하고 길을 계속 걷는다. 나는 걷는 동안 종종 사진을 계속 찍었는데 아저씨는 핸드폰을 꺼낸 적이 없다.
그래서 무슨 사진은 찍었는지 더 궁금해지는 찰나 아저씨가 찍은 스티커가 또 보인다. 더 이상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가까이 가서 스티커를 들여다본다. 귀여운 강아지 사진에 'Buen Camino!'라고 적혀있는 알베르게 광고 스티커이다.
강아지 사진에 마음을 움직인 아저씨라니, '강아지를 좋아하시나?' 생각하고 나도 사진을 한 장 찍는 찰나 아저씨가 나를 지나쳐간다. 스티커를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는 나를 보고 씩 웃어주신다. '어머, 너무 잘생겼어.' 영화에 나올 법한 비주얼의 남미에 살 것 같은 아저씨. 아저씨는 다시 한번씩 웃으시며 나에게 'CUTE' 한마디 남기시고 앞서서 지나가신다.
귀여운 강아지가 순례길의 안전을 빌어줘서일까? 그런 마음을 아는 것인지 큰 뜰에서 흩날리는 비 위로 큰 무지개가 나타났다.
걷다 보면 사람들이 길 가 교통 표지판을 꾸며놓아 그런 것을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소가 많이 출몰하는 지역에는 듬직한 소가 그려진 표지판이 종종 있었다. 요즘 SNS에서 핫한 '총장님 몰래 학교 기물에 눈알 붙이기' 프로젝트처럼 누군가 소 눈 위에 움직이는 눈알 모양을 스티커를 붙여놓았다. 눈알 두 개로 듬직했었던 소는 꽤나 재미있는 꼴이 되어버렸다.
또 차 두대(빨간색, 검은색)가 그려진 표지판에는 웃고 있는 입모양을 그려 넣어 사람 얼굴처럼 만들어 놓았다. 도대체 무슨 의미 인지도 모를 표지판을 보고 피식 웃게 된다. 친구와 그 표지판의 의미를 유추해 보았는데 알 길이 없었고, 나중에 찾아보니 순례자, 자전거, 자동차가 뒤엉키는 길에 순례자가 많아 위험하니 추월하지 말고 운전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이렇게 국유재산을 훼손해도 되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걷는 동안 용감하고 센스 있는 누군가가 벌여놓은 일은 용감하지도 센스도 없는 누군가의 힘든 순례길에 잠깐 웃음 짓고 갈 수 있는 여유를 만들어 주었다.
사람 손이 닿을만한 거의 모든 교통 표지판을 낙서와 스티커로 개성 있게 꾸며 놓았다. 순례길의 맥락 안에서 이 정도는 묵인되는 관습처럼 보였고 그 정도는 오래된 흔적의 축척으로 용인되는 회색지대였던 것이다.
한국을 떠나고 난 뒤 처음으로 음악이 나오는 식당에 도착했다. 메손 카우보이(Mesón Cowboy). 순례길 위 갑자기 카우보이라는 엉뚱한 이름에 고개를 갸우뚱한다.
오늘은 아무래도 카우보이와 인연이 있는 날인가 보다. 식당에 들어서니 이름만큼 강렬한 음악이 나온다. 쿵쿵 쿵쿵쿵. 강렬한 비트가 심장을 쳐댄다. 모범생으로 살았던 순례자라면 오늘은 왠지 순례길의 일탈도 용인될만한 음악이다. 시골에 살던 사람이 도시로 나와 반짝이는 레온사인에 정신을 못 차리고 가슴이 콩닥대는 느낌이랄까.
그만큼 이곳이 순례길 위에서 이질적이고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플라스틱으로 된 빨간 의자에 앉으니 빛이 식당안쪽까지 깊게 들어와 온몸이 따뜻해져 어색함이 풀어진다. 추워진 날씨에 잔뜩 웅크렸던 어깨를 펴고 신발끈도 슬며시 풀어 발바닥을 조금 편하게 만들어 준다.
벽면은 카우보이 콘셉트에 맞게 주인장의 개성 가득 담아꾸며 놓았고, 음식은 간단하지만 꽤 괜찮았다. 커피, 소시지, 감자튀김을 친구와 맛있게 나누어 먹고 오늘도 화장실 이용권을 받았다.
오늘은 어제보다 날씨가 조금 더 추운 것 같다. 바람도 많이 불고 중간중간 이슬비까지 뿌려댄다. 그래도 그 덕에 무지개도 보고 기분이 좋았다. 산 길을 올라갔다 내려갔다 반복한다. 바람이 너무 불어 얼굴이 따갑고 손이 시리다. 경량패딩을 꺼내 입고 손을 주머니에 억지로 집어넣는다.
이제부터 바람이 많이 부는 구간인 것 같다. 언덕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높은 산 초입에 다다르자 주민들이 나와서 장갑, 모자 등 방한 용품을 판다. 바람에 가판대가 흔들린다. 급격히 추워진 날씨에 장갑을 사볼까 둘러보는데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조금만 더 참고 그냥 걸어볼까?' 고민하던 사이 몇 개의 가판대를 지나치고 더 이상 가판대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때 장갑을 샀어야 했을까? 주민들이 순례자에게 해준 경고를 무시한 값은 어떻게 돌려받았을까?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많이 남았는데 세탁을 편하게 하자고 얇은 옷만 챙겨 온 나는 이곳에 벌써 겨울이 온 게 아닐까 걱정이 된다. 오늘은 발바닥에 통증이 오기도 전에 칼바람을 품고 온 추위에 온몸이 으슬으슬 거린다.
어젯밤에 고심해서 고른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대부분의 건물이 그렇지만 돌로 만들어진 이 알베르게가 마음에 쏙 들었다. 빨래를 널 수 있는 넓은 안마당이 있고, 분위기 있는 벽난로가 있는 지하 살롱도 갖춰져 있는 알베르게다.
우리를 안내해 주시는 분은 새침했지만, 큰 배낭을 멘 사람이 그려있는 내 맨투맨을 가리키면서 마음에 드다고 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나도 그게 마음에 든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저녁에 지하 살롱에서 하는 티타임에 꼭 참석하라고 당부한다. 오 듣자마자 참석하고 싶지 않았다. 내향형인 나에게 모르는 사람들과 게다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외국인들과 마주 앉아 대화하는 티타임이라니 듣기만 해도 손발에 땀이 나고 엉덩이를 들썩이게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손발에 땀나는 일은 뒤로하고 우리는 마음에 드는 공간을 만나, 신이 나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스탠딩 빨래터와 탈수기까지 갖춰져 있었다. 처음 보는 탈수기 하나에 조금 더 행복해졌다.
도착 루틴을 마친 뒤 동네 산책을 나갔다. 저녁에 먹을거리를 사러 동네 작은 슈퍼에 갔는데 마땅히 살게 없었다. "또 빵이나 먹을까?"라고 혼잣말을 말했는데 ’ 빵‘이라는 말을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 '빵'을 찾아주는 주인아주머니, 우리는 깜짝 놀라 너털웃음을 짓는다. '빵'은 스페인어로 'Pan'이라고 쓰고 '빤'으로 발음하는데 발음이 비슷해 아주머니께서 알아들으신 거다. 어떻게 많은 한국말 중에 빵이라는 말을 알아들으셨는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동네 산책을 하고 알베르게에 돌아왔는데 오전에 만났던 외국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 아주머니도 이 알베르게에 도착해 계셨다. 알베르게는 보통 겨울이 되면 난방을 시작한다.
우리가 머무를 때는 아직 난방할 시기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종일 차가운 바람으로 얼어붙은 내 몸은 좀처럼 따뜻해지지 않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가지고 있는 옷을 다 끼어 입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있는대도 체온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티타임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티타임에 빠지고 싶었지만, 알베르게 구석구석을 다니며 티타임에 참석하라고 안내하고 다니는 분의 열성적인 홍보에, 그리고 조금은 강압적인 느낌에 어쩔 수 없이 제일 늦게 샬롱으로 갔다.
직접 준비해 주신 먹음직스러운 파이와 따뜻한 홍차도 있었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홍차를 마셨다. 머리가 띵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느낌이다. 가끔 홍차를 마실 때 그런 느낌이 나곤 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아 했다. 그리고 이어 파이를 입에 넣자마자 구토가 올라왔다.
화장실에 가서 먹은 걸 게워내고 침대에 누워있는데 창가에 보이는 잎새가 마치 마지막 잎새인 것 같다. 삼십 분쯤 지났나? 친구가 올라오더니 화장실로 간다. 우리 둘 다 추운 날씨에 탈이 났다. 친구와 번갈아가면서 화장실 들락거리고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누워만 있어야 했다.
하필 오늘 내 침대는 문 앞자리다. 들락날락 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문을 열 때마다 사람들을 따라 들어오는 바람이 차가워 더 움츠리게 된다. 그렇게 눈을 감고 한껏 예민해져 계단을 따라 올라오는 웃음소리, 저녁을 준비하면서 나는 그릇 소리가 너무 시끄럽게 느껴진다.
저녁도 먹지 않고 누워만 있는 우리를 본 한국인 아주머니는 우리에게 본인이 만든 음식을 먹어보라고 하신다. 하지만 목으로 무언갈 넘길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다. 아주머니는 꽤나 차분한 성격이었고, 처음 길에서 만났을 때는 혼자 걷고 계셨는데, 알베르게에 도착해 보니 꽤나 수다스러운 외국인 남편과 함께 걷고 있었다.
아주머니는 순례길을 걷는 동안 스스로 몸을 잘 살피며, 내 몸이 무얼 필요로 하고, 무얼 말하는지 느끼면서 걸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 아주머니의 말이 꽤나 어려웠고 그런 말을 하는 아주머니가 괜히 차갑게 느껴졌는데, 그 후 순례길을 걷는 내내 그 말을 마음에 새기고 걸었다.
방한 용품을 팔고 있던 주민들의 강력한 경고를 무시하고 그냥 와서일까? 추위 때문에 이렇게 아플 수 있다고? 무척 마음에 들었던 이 알베르게를 이제 그만 떠나고만 싶다. 오늘은 일기도 쓰지 못한 채 잠든다. 어쩐지 오늘 하루 운수가 좋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