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하늘에서 본 오리온자리

지구가 둥근 이유

by 서은
아무도 없는 도로 옆 숲길

두 번째 순례잡기


거리 : 29km

시간 : 7시 50분 - 17시

도시 : 비야당고스델파라모-아스토르가

villadangosdelparamo-astorga














지구 반대편에서도 보이는 오리온자리

이른 아침 출발하려고 삐걱거리는 침대에서 스멀스멀 일어나 대충 선크림을 바르고 다시 나설 준비를 한다. 알베르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니 친절한 아저씨가 따라 나와 혹시 스틱은 가져오지 않았냐 물어보신다. 우리가 스틱은 가져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자, 오늘 기온은 8도라고 알려주시며 우리의 두 번째 순례잡기를 배웅해 주셨다.


8시가 가까워졌는데 한밤 중처럼 아직 밖은 캄캄했다. 우리 머리 위 하늘에 오리온자리가 반짝인다. 며칠 전 한국에서 술을 진탕 마신 날 새벽, 놀이터에 앉아서 본 별자리이다.


이렇게 멀리 왔는데 같은 하늘을 공유하고 있는 걸 보니 지구가 둥근 게 확실한가 보다. 나도 자꾸자꾸 걸어 나가며 온 세상 어른들을 다 만나고 갈 예정이다. 비슷한 위도에 있는 나라. 지구 반바퀴를 돌아왔지만 한국에서 보는 하늘과 같은 하늘을 보고 있다.


알베르게 앞에 서서 어두운 새벽 오리온자리 아래 걸어가는 모습을 짧게 영상으로 남긴다. 장난스레 나도 유튜버가 되겠다며 순례길을 걷는 동안 짧은 영상을 찍었었다. 그런데 오래된 내 핸드폰은 배터리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영상은커녕 사진 찍기에도 부족한 배터리, 그리고 날씨가 추운 날엔 저절로 시스템이 재부팅됐다.


그래도 길을 나서는 아침에는 그 순간의 공기와 다시는 올 수 없는 이 마을을 기억하기 위해 꼭 짧은 영상을 남긴다. 나는 초 겨울 차가운 공기를 좋아한다. 아직 온전히 춥지는 않지만, 곧 추워질 공기가 코 끝에 닿아서 코끝이 살짝 시려지는 날씨를 좋아한다. 이때의 공기가 그랬다. 코 끝에 시려지는 차가운 공기를 영상에 듬뿍 담았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일출.

오늘은 다시 발걸음이 가볍다. 어제 길이 끝나갈 때쯤 내일은 못 걷겠다 싶었는데 하루를 온전히 쉬고 나니 또 걷게 된다는 게 신기하다. 진부한 말이지만,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그 말을 직접적으로 체감하게 된 날이다. 발걸음이 가벼워서 오늘은 왠지 쉽게 걸을 것 같다.


비야당고스델파라모에서 출발하는 순례자가 별로 없어서인지 길에 인적이 드물다. 갈대숲에서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해 조금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무서울까 봐 그렇지 않은 척 걸어간다.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 어두운 숲길을 지나 도로 옆 숲길에 다다랐다. 간간히 차가 지나다니니 무서움이 조금 가셨다. 그제야 왼쪽 하늘에 빨갛게 태양이 떠오른다. 잠시 멈춰 서서 일출을 배경으로 친구와 기분 좋게 셀카를 찍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고 긴 언덕 꼭대기에 다다르니 올라온 만큼 내리막 길이 보인다. 이제 다시 내려가야 하다니 허무해지는 순간이다. 저 멀리 소실점으로 보이는 길의 끝을 보고 맥이 빠져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더니 앞에 걷던 순례자들이 무슨 일이 있나 뒤돌아본다. 머쓱해진 상황에 친구와 나는 더 큰소리로 웃는다. 하지만 우리는 멈출 수 없었고 다시 앞으로 걸어 나가야 했다.


'이 길의 의미는 뭘까?', '내가 이 길을 왜 걷고 있는 걸까?' 끝까지 이 길을 걸어도 의미를 찾지는 못할 것 같은 예감이다. 나와 친구는 충실한 성직자도, 기도로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저 유행에 따라 이 길에 편승한 걸까?', '그렇다고 그게 잘못됐다고 할 수 있을까?'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뒤엉켜있다.


만족스러운 점심 정식

오늘도 역시 한참을 걸어도 마을이 나오지 않는다.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쳤고, 식당이라고는 없을 것 같은 한 마을에 도착했는데 이곳에서 점심을 해결해야만 했다. 이곳을 지나면 다음 마을이 나오는데 한참 걸리기 때문이다. 구글 지도를 보고 찾아간 마을에 하나뿐인 식당은 외부에서 보면 전혀 식당처럼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들어가 보니 식사를 마친 순례자들이 다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아버지와 딸이 운영하는 식당이었다. 조금 어설프지만 따뜻한 국물이 있고 샐러드도 있는 정식 만찬에 우리는 오랜만에 음식다운 음식은 먹는다며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쳤다. 거기에 후식 아이스크림까지 너무 완벽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을 털어 밥값을 지불하고 기분 좋게 식당을 나선다.


어제 조금 걸은 탓에 오늘은 조금 많이 걸어야 한다.


나는 벌써 엄지발가락에 물집이 잡혀있었다. 딱딱한 신발 바닥과 내 발바닥이 마찰할 때마다 발바닥의 고통이 한쪽 무릎까지 고스란히 타고 올라왔다. 나는 평소에도 조금 많이 걸으면 발바닥이 아팠다. 평소보다 많이 걷게 된 순례길에서는 통증이 더 심해졌다.


이때만 해도 모든 사람들이 이 정도 걷게 되면 나정도 통증을 느끼는 줄 알았다. 발바닥 아치가 높아 내 발은 땅바닥에 힘을 잘 전달하지 못했고 그때마다 다른 곳에 힘이 잘못 전달되어 오는 통증이었던 것이다. 그래도 식사하면서 발바닥을 조금 쉬어주니 썩 괜찮아졌는데 다시 걸으니 금세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순례길을 오기 전 책자에서 본 듯한 커다란 십자가 앞에서 휴식을 취했는대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언덕 아래 오늘 머무를 마을이 보이는데 제대로 걷질 못해 신발을 거의 끌다시피 천천히 걷는다.


눈으로 보기엔 가까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먼 거리였다. 걸어도 걸어도 끝나지 않는 길에 절망을 느끼던 찰나 다리가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나보다 잘 걷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절뚝거리면서 걷고 있는 할아버지를 보니 불같이 솟아올랐던 마음이 다시 가라앉았다. '


육신의 고통을 극복하며 걸어야 이 길이 의미 있는 걸까?', '이런 고통을 자발적으로 감내해 가면 이 길의 끝은 내가 조금은 변화되어 있을까?' 이 길의 끝에 서면 자만심이 꺾이고 마음이 가벼워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찾지 못하고 아무것도 아닌 하루를 버텨낸 나만 남아있을 것 같다. 반도 걷지 않았지만 알 것 같다. 역시 아직 자만심이 충만하다.


앞서 가는 친구

출발할 때는 내가 앞서서 걷고 도착할 때쯤은 친구가 앞서서 걷는다. 나는 친구의 한참 뒤에서 친구를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걸어본다.


어그적 어그적 걷다가 나이가 지긋하신 아저씨를 만났다. 오늘 어느 알베르게에 묵냐고 물어봐서 우리가 점찍었던 알베르게를 말했더니 본인도 그곳에 묵는다고 했다. 본인은 걷고 아들이 숙소를 예약해 준다고 했다. 친구와 나는 우리도 아들이 필요하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알베르게에 도착했는데 예약이 가득 차서 우리가 머물 자리가 없었다. 언덕 위 공립 알베르게로 가라고 한다. 어쩔 수 없이 뒤돌아 나오는데 아저씨가 도착했다. 우리에게 안타까운 표정을 짓는다. 우리도 거기 갈 거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했는데 성치 않은 다리를 끌고 체감상 90도쯤 돼 보이는 급경사 위에 있는 공립 알베르게로 가야 했다.


왠지 모를 엄숙한 분위기에 두 손이 절로 모아졌다. 7유로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일회용 침대 시트를 받아 계단을 올라가 보니 인구 밀도가 엄청난 알베르게였다. 복도도 화장실도 식당도 세탁실도 북적거려 뭐라도 하려면 혼이 쏙 빠졌다.


신발을 벗어 놓으려고 신발 방 문을 여니 고약한 발냄새가 잔뜩 섞여 있다. ‘윽 내 코 살려.’ 내 신발도 그 냄새에 레이어드 해 놓는다. 샤워실과 화장실은 남녀공용지만 다행히 칸막이와 문은 있다. 그리고 다행히 방은 남녀가 분리되어 있다.


2층 침대 2개가 있는 4인실이었다. 자전거로 순례길을 여행하고 있는 코찌를 한 멋진 친구 한 명과 쉴 새 없이 방을 들락날락하는 조금 나이가 지긋하신 아주머니 한 명이 오늘의 룸메이트이다.


그리고 주방엔 훌륭한 뷰를 가진 멋진 테라스가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서 테라스는 이용하지 못했다. 저녁은 레온에서 산 소중한 라면 하나에 밥을 말아 나누어 먹었다. 그 맛이 너무 좋아 라면을 더 샀어야 한다며 친구와 열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순례길 이틀 만에 항상 라면은 두둑이 구입하자라는 교훈을 얻었다.


공립 알베르게 테라스에 있는 모빌

도착 루틴을 마친 우리는 오랜만에 도시의 향기를 맡으러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나왔더니 갑자기 비가 내린다. 잠깐이지만 내일은 준비해 온 판초를 사용해 볼 수 있을까 하는 바보 같은 설레발도 쳐본다.


비를 맞으며 뛰어가서 고급스러운 상점에서 가방에 메달 조개껍질 모양 키링을 사고 슈퍼에서 내일 아침으로 먹을 간단한 음식도 샀다.


슈퍼에서 내 카드가 결제가 안 돼서 친구 카드로 결제했는데 앱에 들어가 확인해 보니 내 카드도 결제가 되어 있었다. 마드리드에서부터 써온 트래블월렛은 랜덤 하게 일하는 아주 고약한 카드였다. 다행인 것은 친구와 내 카드 중 하나는 꼭 결제가 가능했다. 둘이 여행을 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현금을 들고 다니느라 조금 고생했을 것이다.


캐셔에게 중복 결제된 내용을 보여줬더니 그저 옆에 서 있으라는 손짓만 한 뒤 본인 할 일을 계속한다. 옆에 스페인어를 할 수 있는 순례자 청년이 소통을 도와줬다. 잠깐 기다리면 결제가 취소될 것이라고 했다. 그라시아스. 사실 캐셔 아줌마가 해결해 줄 것은 없었다 시간이 해결해 줄 일이었다. 우리가 스페인어를 못 알아 들었을 뿐. 지구는 둥근데 언어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