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리아, 100km의 시작점
열 번째 순례잡기
거리 : 22.3km
시간 : 8시 20분 - 15시
도시 : 사리아 - 포르토마린
sarria - portomarin
사리아는 큰 도시이다.
도시가 큰 만큼 볼거리도 많고, 시내도 사람들로 북적인다. 사람들도 말끔한 옷차림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북적임이 어딘가 낯설게 느껴진다. 사람도 소음도 없던 순례길에 익숙해져 있나 보다.
어젯밤에 장을 보러 마트에 갔는데 딱히 살 것이 보이지 않았다. 마트는 큰데 내가 필요한 것은 정해져 있었고, 그 외에는 나에게 의미 없는 것들이었다.
북적거리는 시내를 벗어나 한적한 숙소 쪽으로 오니 마음이 편안해질 만큼 조용한 것이 좋아졌다.
사리아에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의 거리는 딱 100km이다. 순례길을 다 걷고 나면 순례길을 걸었다는 인증서를 받을 수 있는데, 최소 100km를 걸을 사람들에게만 준다. 그러니 시간을 많이 낼 수 없는 사람들은 사리아에서 순례길을 시작하곤 한다. 3~4일을 걸으면 순례길 인증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물통 하나씩 손에 들고
나란히 걷고 있던 중년의 남자들.
동상 앞에서 셀카를 찍어 추억을 남기고
다시 길을 나서는 부부.
작은 가방을 메고 데이트를 하는 듯한
풋풋한 남녀한쌍.
언덕에서 드론을 날리며 그곳을 기억하려는
알 수 없는 조합의 무리.
사리아의 아침은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동안 보았던 사람들의 표정엔 먼 길을 걷느라 지쳐서 피로가 느껴졌지만, 오늘 본 사람들은 얼굴이 화사하게 피었다. 비교적 몸을 가볍게 하고 걷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들인 만큼 신발은 깨끗하고, 작은 가방을 멨고, 발걸음은 가벼워 보인다.
겉으로는 새 신발 같았던, 12년 된 샛노랗던 내 신발. 걷는 동안 앞코에 주름이 생기고 먼지가 쌓여 새까맣게 변했고, 깔창이 떨어져 이곳저곳에 하얀 접착제 자국이 있었다. 순례길을 다 걷고 버릴 요량으로 신고 왔지만, 나와 함께 완주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이제 나흘만 버티어 주길 바란다.
엊그제 트라야 카스텔라에서 우리가 묵었던 돌집을 지나가시면서 이 숙소는 가격이 얼마냐고 물어보셨던 할아버지가 어젯밤 사리아에서는 우리의 룸메이트였다. 숙소에 신발장이 따로 없어 우리는 운동화를 화장실 근처에 놔뒀다. 그러고 저녁을 먹고 돌아오니, 할아버지께서도 우리 신발 옆에 나란히 본인 신발을 놓아두셨다. 신발을 가져다 놨을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니 그게 꽤 귀엽게 느껴졌다.
빼빼 마른 할아버지는 오래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이 신어서 여기저기 해져있었다. 내 신발은 산지 오래됐지만 몇 번 신지 않았기 때문에 겉모습은 새 신발 같았지만, 걷는 동안 고무 깔창이 떨어져 접착제로 여기저기 기워있었다. 두 개의 신발 다 버리기 직전의 신발이지만, 어딘가 다른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그 오래된 신발을 어디까지 데리고 다니셨을까? 내 신발은 십여 년 동안 열 번도 채 안 되는 횟수로 산에 가봤고, 신발장에서 생을 마감하려다 이곳 산티아고까지 오게 되었다.
그 마지막이 산티아고 순례길이라 내 신발에 조금 덜 미안해해도 될까?
이곳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게 해 준 것으로 충분할까?
끝날 것 같지 않던 순례길도 이제 나흘만 더 걸으면 끝이다. 순례길을 시작하고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을 때 나는 이 길을 선택한 스스로를 돌아봤다. 걷기 시작했으니 걷고 있을 뿐, 내가 왜 이 길을 걸으려 했을까, 의문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그 누구에게도 이 길을 추천해주지 않으리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제 곧 눈앞에 펼쳐질 목적지에 아쉬움이 커진다.
이제 걷는 것도 익숙해졌고, 발도 신발에 적응해 물집도 잡히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볼 여유도 생겼다.
그리 길지 않은 남은 나흘은,
사리아에서 길을 시작하는 사람들처럼 나도 다시 시작하는 기분으로 걷기로 한다.
남은 100km는
몸보다 마음으로 더 걷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