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디자인 의뢰였다
나는 디자이너다.
디자인을 전공하기 위해 입시미술을 했고, 대학에서 시각디자인학과를 전공했으며 지금은 브랜드 패키지 디자인 석사 과정을 이수하고 있다. 식품회사에서 패키지 디자이너로 근무하는 등 실무 경험도 6년 정도 있다. 이 정도면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라고 얘기해도 되지 않을까.
신입으로 근무하던 시절 주어진 업무마다 막막하고 어려워서 경력이 10년쯤 되는 과장님께 '그 경력쯤 되면 디자인이 좀 쉬워지나요?'하고 여쭤본 적이 있었다. 내 질문에 '쉽진 않고 어떻게 하면 되는지는 이제 알고 있다.'라고 대답하셨던 과장님. 대리급으로 근무하던 나는 이제 그 마음이 뭔지 알고 있던 참이었다. 항상 맘에 쏙 드는 결과물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그럴듯한 결과물을 도출해내는 데는 어려울 게 없었다. 주어진 디자인 업무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그런데 피클 공장을 시작하면서 내 제품에 적용할 디자인을 시작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무서웠다.
내가 지금 하고자 하는 방향이 맞는지 확신이 없었고, 확신이 없으니 작업 과정 내내 흔들리는 것이다. 무수히 많은 레퍼런스들 중 내 맘에 드는 것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이 방향 저 방향 다 가보고 싶은데 그럴 수 없는 것이 브랜딩인 것을 알아버린 나는 너무 괴로웠다. 내가 하는 디자인이 고객이 공감해주고 좋아해 줄지 확신이 없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고객들도 눈치챌지 알 수가 없는 것이 어려웠다.
내가 정한 방향에 내가 온전히 책임을 지는 것.
아마도 그것이 가장 큰 원인이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결과물에 대한 피드백이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나를 더욱 혼란하게 했다. 회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든 외주 작업이든 디자인은 늘 명확한 클라이언트가 존재했다. 피드백과 함께. 그들이 원하는 방향을 잘 캐치해 작업물에 반영하는 것이 훌륭한 디자이너라고 생각하면서 일했다. 이런 과정이 익숙했던 나는 나도 모르게 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 작업물, 내 디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온전한 나만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지금 피클 공장을 시작한 지 반년 정도 흘렀고 여전히 내 디자인을 하는 것이 너무 어렵고 무섭지만, 모든 게 무서웠던 신입이 점점 디자인하는 법을 알아차렸던 것처럼 언젠가 이 일도 익숙해지고 잘하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날 성장시켜 줄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러니까 하자. 일단 하자.